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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me Cover Story (1953년 3월 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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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제 : The Walnut

발행일자 : Monday, Mar. 09, 1953



 

지난주 서울 외곽에서 몇 마일 떨어진 난민촌에서 안남창 씨(女, 31)와 그녀의 가족은 집에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녀의 남편은 전쟁 초기에 발생한 최소 100만 명의 남한 민간인 사상자 가운데 하나이다. 연로한 그녀의 아버지는 여전히 문산 근처 2,500평 규모의 농장에 생존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그녀에게는 세 아이가 있다.
하지만 그 정도로는 충분하지 않은 듯 어린 소녀 하나를 더 입양했다. 이 소녀는 한국의 전쟁고아 10만 명 중의 한 명이다. 안남창 씨가 이 아이를 거두지 않았다면 생존해 있을 가능성은 없다. 유엔의 민간 원조 프로그램은 아이들에게 칙칙한 올리브 색(군복 색)바지를 입혀 키우는 이런 안남창 씨를 2년간 돌보고 있다.
안남창 여사는 개가죽으로 만든 목도리를 두르고 있었는데 그녀가 아끼는 것이다. 과부를 달갑게 여기지 않는 이 나라에서 31세에 과부가 되었지만, 그녀가 아버지를 만날 수만 있다면 가정을 꾸려나가는데 어렵지 않을 것이다.
지난주 한국에는 서울에서 문산으로, 그리고 의정부 동쪽으로 안남창 씨 가족과 같은 수많은 난민의 이주 행렬이 굽이굽이 이어졌다. 1,000여 개의 작은 촌락 정착촌에 이르러 난민 일부는 교착 상태에 빠진 전선 내의 포성이 들리는 전전(戰前) 마을에 자리를 잡았다. 소나무 묘목을 심고 청회색 재를 따로 긁어모아 가면서 여성과 아이들은 새 지붕으로 얹기 위한 볏짚단을 가지런히 빗어 내리고 있었다.
남한 내의 2,200만 인구 중 약 4분의 1이 노숙자이다. 그들이 아무리 열심히 희망에 차서 일하더라도 파괴된 60만 채의 가옥을 다시 세울 수는 없을뿐더러 북쪽에서 내려온 피난민에게 필요한 25만 개 가옥을 새로 지을 수도 없다.


북과 남

거의 3년의 전쟁 끝에 한국에는 별로 남아 있는 게 없다. 38선 이북의 황폐함은 더 심하다. 유엔 정보국은 폭격 그리고 항공기 폭탄 투하가 모든 종류의 거주지 중 40%를 파괴했다고 추정했다. 유엔군 폭격기는 더 이상의 목표물을 가지고 있지 않을 정도이다.
이 전쟁으로 북한 인구가 약 8백만 명에서 4백만 명으로 줄어들었다. 이들은 영양실조와 추위로 사망했거나, 자유를 위해 남쪽으로 도피했거나, 점령한 공산주의자에 의한 숙청으로 사라졌다. 북한군은 한때 강력한 군단이었다. 그러나 지금 남아있는 군대는 5만여 잔당의 그림자에 불과했다. 북한 주민들은 폭력에 시달렸다. 그것이 그들을 지배하는 점령자의 모습이었고, 현재 연합군이 직면하고 있는 중국 공산주의자의 모습이기도 하다.
남한의 군사력은 최상이었다. 미국이 주도하는 군사력 덕분으로, 유엔 14개국의 값진 도움 덕택으로, 한국인 자신의 불굴의 정신으로, 그리고 한국 최초의 단일 대통령 이승만의 헌신으로 조화를 이루었다. 12개 사단을 포함한 40만명의 한국군은 추가적인 공격에 대비해 이 신생 공화국을 보호하고 있으며, 곧 전선 전체를 장악할 만큼의 강인한 전력을 빠르게 구축해가고 있다. 아니, 이미 절반 이상을 확보했다.
그렇지만 그 전선의 이면 후방에서는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전국이 광범위하게 파괴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수도 서울은 거주지를 잃은 사람이 인구의 80%이다. 사방의 공공건물은 폐허가 되었고, 공공 업무는 임시행정에 불과했으며, 전국의 학교 중 2/3가 사용할 수 없도록 파괴되었다. 이승만과 그의 국민이 처한 난관은 남북전쟁 이후 황폐해진 미국 남부의 재건 시대 상황과 유사하다. 모든 광산과 섬유 공장의 약 75%가 심각한 피해를 입은 것이다.
작동할 만한 산업 시설은 유지 보수 및 장비가 부족한 실정이다. 임시로 가동하는 현장들이 대부분의 청년을 흡수했지만, 여전히 수천 명의 실업자가 있다.
고철 사업자들은 임시변통한 물자로 고군 분투하고 있다. 비행기 잔해의 알루미늄으로 만든 조리기구, 오래된 마가린 캔을 쳐서 만든 양동이, 마모 된 트럭 타이어로 만든 카누 모양의 고무 운동화, 버려졌거나 빼돌린 미 육군 군복을 잘라 만든 남성용 여성용 의류 등.
한국에 새로 입국해 들어온 한 유엔군 장교가 한국인의 패션을 처음 보고서는 “미국의 국방색(올리브색)이 한국의 국가색인 것 같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수천 명의 UN군 병사들이 지닌 정의는 결코 피상적인 게 아니었다. 이 작은 공화국 (인디애나보다 약간 작다)을 넘어 구석구석 전진하여 침략자들과 싸우며 때로는 자신의 목숨을 이 나라 방어에 내맡겼다.
전쟁의 물리적 측면에 압도당한 그들에게는 냉혹한 내면적 비극까지 평가할 겨를이 없다. 유엔군 병사는 한국 학교 선생님의 한달 봉급이 쌀 7kg과 커피 10잔을 마실 정도밖에 안 된다는 사실을 모른다. 의사가 페니실린을 암시장에 내다 파는 것은 수입이 월 10달러 미만이기 때문이라는 사실도 모른다.


원화 & 손실

지난 주 부산 파고다 홀(한때 일제가 레슬링 경기장으로 사용했던)에서 개최된 한국 국회는 급속한 인플레이션을 막기 위한 조치를 취함으로써 임금과 연봉에 대한 슬픈 농담 하나를 자아냈다. 6개의 미 육군 실내 난방기에서 뿜는 디젤과 등유 연기는 홀 뒤편의 마늘 냄새와 뒤섞여, 거기서 수백 명의 호기심 많고 열정적인 관객이 그 절차를 지켜보았다는 것이다.
9일 전 정부는 인플레이션에 대응하기 위한 아주 간단한 수단을 발표했다. 현재 통화(원화)를 회수하고 새로운 통화(환)로 바꾸는 것이다. 국회를 가득 채운 질문은 기존의 은행 예금 중 어느 정도가 이 거래에서 일시적으로 차단되는지에 관한 질문이었다. 정부가 이 법안에 대해 말한 바와 같이, 암시장으로부터 정치적 야당에 이르는 광범위한 국민의 자산 75%를 동결시킬 것이다.
단정한 갈색 정장을 입고서 자신감에 찬 백두진(Paik To Chin) 재무장관은 자신이 원하기만 하면 언제나 자기가 원한 그 자리에 의회가 함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고는 의회에 그 폭탄을 던졌다. 기존의 모든 실질 ‘원화’는 ‘환화’로 바뀌어야 한다는 결정이었다. 그러나 많은 의원들이 자신의 비자금 중 일부가 봉쇄당하는 걸 감수하는 대신, 정부의 인플레이션 억제 기회를 망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경제에서든 정부에서든 질서가 잡혀있다는 사실은 여전히 기적이었다. 모든 면에서 주목할 만한 노인이자, 반세기를 넘게 한국의 자유를 위한 선미(船尾) 전투기와 같았던 78세의 이승만 대통령 덕분이었던 것이다.


깨뜨릴 수 없는 사람(Uncrackable)


이승만은 아시아 정치의 호두(walnut)이다.
갈색에 주름지고 철갑인 그는 비극적인 자기 모국을 통치하면서 직면하는 엄청난 압박감을 침묵으로 저항한다.
방문자는 대개 그를 어느 정도 거리에서 보기 때문에 그의 늘어진 눈꺼풀, 경련에 떠는 오른 눈, 그리고 탄력 없는 피부에 감춘 그의 중압감을 알아채지 못한다. 단지 왜소한 체구의 불안정한 기력, 회의적인 눈, 그런 것만 눈에 띈다. 그러나 이승만은 한국의 오랜 기억과 함께하는 인물로서 한국 독립 투쟁의 마지막 영웅이다. 저 서울 밖에는 고종 황제의 간수가 이승만의 손가락을 짓이기던 남대문 교
도소 폐허가 있다. 손가락이 거의 찢어질 때까지 나무 막대 사이에 손가락 관절을 끼워놓고 고문했다. 그는 거기서 7년간 투옥되었다.
어린 시절 이승만은 배재(Pai Chai) 감리교 선교학교에 다녔는데, 선교사들과 그들의 부인들이 감옥에 갇힌 그를 방문했다. 그곳에서 그는 기독교로 개종했다. 1904년 일본인이 한국을 점령하고서야 이승만은 일반 사면으로 풀려났고, 즉시 미국으로 건너갔다. 그는 6년 동안 대학에서 공부하고, 하버드 대학교에서 석사학위(M.A.)를, 그리고 프린스턴에서 박사학위(Ph. D.)를 받았다. 한국
에 돌아와 기독교 운동을 이끌면서 일본에 대한 비밀스런 저항에 착수했다. 일본이 그의 존재를 알아차렸을 때, 그는 하와이로 빠져 나갔다. 1912년의 일이다. 그 뒤로 그는 33년 동안을 망명 생활을 해야 했다.


30만 달러짜리 머리


서울에서는 개혁당이 지하 임시 정부를 창설하고 궐석 상태에서 이승만을 초대 대통령으로 임명했다. 일본 사람은 우리나라 민족주의자들의 피 맛을 보기 시작했고 이승만에게는 30만 달러의 현상금을 걸었다. 1920년 상하이에서 열린 회의에서 한국 민족주의자들은 일본인에 대한 조직적인 군사행동 계획을 세웠다. 나중에 일본 군대가 만주를 공격했을 때 2만 명의 한국군이 중국군 곁에서 싸웠다.
1800년대 초 미국인들의 혁명이 미국인들 각자의 마음속에 깃들어 있다면, 이승만의 동포들에게 이승만은 조지 워싱턴(George Washington)의 위상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의 동포들이 아직 한국의 토머스 제퍼슨(Thomas Jefferson)에 관해 들어 본 적이 없다면, 그것은 한국의 정치 풍토가(그리고 이승만 자신이) 그런 민주적 인물상의 자유로운 발전에 반대하기 때문일 것이다.


경계병 마마(Momma)


제네바에서 이승만이 무심하기만 한 국제연맹(League of Nations)을 상대로 한국에서 벌어진 (일본에 의한 점령) 사건을 고발하고자 애쓸 무렵(1932년) 비엔나 철강 상인의 딸 프란체스카 마리아 바바라 도너(34 세)를 만났다. 2년 후 그들은 뉴욕의 감리교 예식으로 결혼식을 한다.
이승만은 전선에서 남쪽으로 30마일밖에 안 떨어진 서울의 언덕 위 소박한 저택에서 주거한다. 프란체스카 여사는 자기 집에서 끊임없는 ‘경계 근무’를 선다.
회갈색 머리카락과 밝은 녹갈색 눈을 가진 경계심 많은 이 작은 여성은 비엔나에서의 활기를 전혀 잃지 않았다. 그녀의 물결 스타일 드레스는 오스트리아 소작농 분위기가 물씬 나는 드레스이다. 그녀는 워싱턴 사회, 홍콩의 사회적 음모, 뉴욕이나 파리의 유행에 관해 경쾌하게 이야기한다. 그러나 관찰력 있는 방문자라면 눈치챌 것이다. 프란체스카 여사가 정치와 권력에 단련된 여성이
라는 사실을.
그녀는 중요한 회의에 꼭 참석하거나 뒤에서라도 참관한다. 그녀와 이승만이 만났을 때 그들의 언어는 영어였다. 그녀는 젊은 시절 독일어를 다 잊어 버렸다고 공언하면서 영어는 이승만보다 훨씬 뛰어나므로 까다로운 인터뷰에서는 그를 도와주는 경우가 많다. 그녀는 또한 ‘주방 한국어’라 부르는 언어로 말한다. 그 언어로 그녀는 대통령의 느려터진 속기사를 다그치고, 오찬을 지시하고, 이승만의 경찰 조직에 대한 정보에도 유의한다. 한국 장성들과 정치인들은 그녀에게 엄청난 존경심을 표한다.
과소평가 마시라… 프란체스카 여사의 한국 정치에 영향을 미치는 정도는 이들 부부를 함께 본 모든 사람의 흥미로운 주제이다. 어떤 사람은 여사가 대통령직의 배후 세력이라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이들은 언제나 함께 한다는 사실이 진실이다. 프란체스카는 자신의 권리 안에서 영리하고, 강하고, 그리고 경계심 많은 조력자이다. 집에서나 정치에서나 한때 장개석과 그의 아내가 그런 것처럼 이승만 부부도 그럴 것이다.
이승만의 일과는 오전 6시에 토스트, 커피, 햄, 계란 등 서양식 아침 식사로 시작한다. 그 후에는 진돗개를 데리고 산책하는 것을 좋아한다. 비서관과 함께 신문을 훑어본 다음 각 대사관과 부처들의 보고서를 검토한다. 지난주 이승만 대통령은 국무총리 서리 백두진이 스스로 공산주의자임을 자백한 것처럼 쓴 혈서 한 통을 받았다. 그러나 이승만은 편지가 가짜임을 스스로 발견했고, 조사관은 편지가 백두진의 정적이 모의하여 서울의 한 다방 마담이 닭 피로 쓴 편지임을 밝혀냈다. 이승만의 예리함은 절대 만만치가 않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는 비행기와 지프를 타고 동결 상태의 전장에 나간다. 전선을 둘러보며 한국 또는 미국의 국가가 연주되는 동안 회색 모자를 가슴에 대고 있노라면 바람이 그의 가는 백발에 휘몰아친다. 그렇지만 다른 일상에서 (특히 피곤할 때) 이 노인 대통령은 축 늘어지고 만다. 프란체스카 여사가 방문객이 좀 과하게 머물러 있다고 생각할 때면 “파파, 오늘 오후에 커피나 차 마실 거
죠?” 하는 사인을 보낸다. 그녀의 목소리를 듣고서야 수천 개의 주름진 얼굴에는 미소가 떠오른다. 사적인 면에서 대통령은 프렌체스카 여사를 “마마”라 부르고, 최근 몇 개월 그는 그녀의 전적인 보살핌을 필요로 했다.
이승만의 경우처럼 ‘정부’는 거의 한 사람의 일이다. 그는 백두진 총리와 정보부 장관 클레어런스 리(Clarence Ryee)처럼 몇몇 신뢰할 수 있는 내각을 보유하고 있다. 그 밑에는 이승만의 지시를 세심하게 받드는 소수의 장관과 공무원들이 있다. 정부의 호의는 이승만과 그의 친밀한 사람들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다. 예를 들어 500달러 이상의 모든 외화자금할당(外換配定)은 이승만이 직접 승인해야 한다. 정부 운영에서 가장 엄격한 정직을 지키기 위해 부과된 이 통제에는 단점도 있다. 중요한 결정은 필연적으로 대통령의 승인을 기다려야 하며, 그가 무기력해지면 국정 또한 기력이 회복되기를 기다려야 한다. 지난주 한 관료는 이렇게 말했다.
“노인이 아플 땐 한국도 아프답니다.”


통치자 주권에 대한 신뢰

통치 주권 신뢰, 이 정책을 추진함에 있어서 이승만은 그가 움직이고자 하는 한국 정치인들의 진정한 불신에 봉착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불신과는 별개로 그의 행동에는 더 많은 뭔가가 있었다. 그것은 국민이 자신에게 부여한 주권적 권리로 통치한다는 열렬한 그의 믿음이다.
작년 국회에서 그 믿음을 분명하게 보여 주었다. 제정된지 5년 된 한국 헌법에 따르면 의회가 대통령을 선출한다. 따라서 의회는 이승만의 임기가 곧 끝나고서 헌법상의 권리를 행사하기 원했다. 대다수가 이승만에 반대했기 때문에 이것은 새 대통령의 선출을 의미했다. 대망을 가진 사람 중에는 전직 장관인 장면(John Myun Chang)이 있었다. 미국에서 교육받은(포드 햄) 지성인이었다.
이승만은 국민 투표로 대통령을 선출해야한다고 주장했다. 의회는 반대했다. 이승만은 계엄령을 선포했고 경찰이 12명의 의원을 체포하여 공산주의 음모로 기소하고 의회 회의실을 뚫기 위해 자신의 지지자들을 보냈다. 장면은 미 육군 병원으로 피난했다. 이승만은 경찰을 보충하기 위해 한국군 2개 사단을 빼내겠다고 미국에 위협했다. 이 일로 그의 의좋은 친구인 제 8군 사령관 밴 플
리트(Ban Fleet)가 부산으로 날아와 이것은 유엔군과의 공개적인 파탄을 의미할 것이라 말하기도 했다. 미국의 소리(Voice of America)가 자신의 행위에 대해 논평하자 이승만은 방송을 중단하고 뉴스와 출판물에 대한 검열을 요청했다. 미국의 항의에 대해 그는 “당신들이 나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안다. 난 상관 않는다.”고 쏘아붙이기도 했다. 마침내 의회는 그의 임기 연장을 결정했고,
8월 총선에서(유엔 참관인은 공정하다고 생각했다)국민들은 압도적 다수로 이승만을 다시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따라서 통치 주권에 대한 그의 주장은 정당성을 띤 셈이다.


민주주의 댓가

대화에서 이승만은 “의회는 누군가에 의해 선출된 누군가에 의해 매수될 수 있다”고 말하면서 자신의 태도를 변론했다. 지금까지 남한 내 공산주의의 위협은 게릴라를 제외하고는 사보타주와 간첩 행위에 국한되어 왔다. 그러나 여전히 북한에 거대한 중국 공산군이 있기 때문에 그 위협은 현실이다.
이승만의 위대한 힘은 자신의 나라와 그 나라를 지키기 위한 한결 같은 헌신에서 나온다. 이로 인해 그는 공산주의에 관한 아무런 환상도 남기지 않았다. 이렇게 말한다.

“공산주의는 전쟁에 의해서만 물리칠 수 있다는 사실이 내게는 분명하다 … 우리가 가져야 할 확신은 소련 체제가 좌절하고 패배하여 생존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러시아 국민과 그 위성 국가 사람들에게도 숨길 수 없는 패배가 틀림없다. 우리가 이를 철저히 관리한다면 그 체제는 반드시 무너질 것이다. 러시아 국민과 그 위성국 사람들은 일어나 공산주의를 포기할 것이다. 나는 확신한다. 그러나 그들은 공산주의 정권의 두려움과 약점이 드러나지 않는 한 결코 실행에 옮길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이 일은 정치적 승리가 아닌 군사적 승리로만 이루어질 수 있다. 우리가 제 3차 세계 대전을 피할 수 있
는 유일한 기회는 작은 전쟁 중 하나에서 그러한 패배를 그들에게 안겨 주는 것이다.”

2년 전 개성에서 평화 협상이 시작되었을 때 이승만은 그것이 공산주의자의 또 다른 속임수라 비난하면서 유엔이 휴전 협정을 체결한다면 한국군은 (단독으로) 압록강으로 진격할 것이라 덧붙였다. 이승만의 호전성(Rhee's truculence)은 많은 한국인에게 반향을 불러일으켰고, 이를 이해할 수 있는 것은 북한의 전력자원, 비료공장 및 철광석이 없으면 남한은 구걸이나 해야 하는 경제적 빈국 신세를 면치 못하기 때문이다. 이승만은 지난해 12월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한국을 방문했을 때 (평화) 협정의 조건은 반드시 한국의 통일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전향자 진술

1950년 공산주의자들이 한국을 침략하기 전과 그리고 북한의 붉은 깃발이 서울을 점령한 시기에 한국의 지식인들은 벼가 익은 논밭의 까치들 같이 북쪽 공산주의자들에게 몰려들었다. 일부에게는 그 변화가 영구적인 것이 되었다. 그들은 지금도 북쪽 공산당 정부 안에 갇혀 지낸다. 그러나 일부 의문을 품은 자들은 이승만 정부와 함께 남아 어떤 시기가 올지 지켜보기로 선택했다. 이들은 지난 18개월 동안 남한에 남아있으면서 의심을 해제했다.
이번 주 백열전구로 불을 밝힌 부산의 한 다방에서 남한의 한 기자와 대화를 나누었다. 그는 원래 공산주의자로 전향하려고 계획했었다. 그러나 마지막 몇 분을 앞두고 그의 마음이 바뀌었다고 한다. 노인의 완고함이 그의 나라에 톡톡한 대가를 치르게 만드는 것에는 저항하지만, 이승만에 대한 그런 비판적 견해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승만이 오늘날 한국에서 가장 강력한 정치 세력이라는 정당성에 위에 서 있는 이승만 지지자였다.
다부지고 날카로운 얼굴의 기자 백정묵(38세)은 일본과 독일에서 유학했으며 매서운 지적 힘이 엿보이는 인물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헤럴드 라 스키(Laski, Harold Joseph, 영국 노동 이론가)가 쓴 모든 작품을 읽었고 수년 동안 그를 숭배했지만, 그때의 내가 틀렸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지금 나는 더 견고한 땅으로 돌아왔습니다.”

변화를 일으킨 것은 무엇일까? 백정묵은 금이 간 도자기 컵에서 Four Roses 위스키를 반 잔 정도를 내린 다음 따뜻한 견과류 몇 개를 들고 말을 이어갔다.

“많은 옛 친구들은 지금 북쪽에서 공산주의자들과 함께 있습니다. 하마터면 나도 같이 갈 뻔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이제 왜 (나를 포함한) 그들이 틀렸는지를 압니다. 그것은 당신과 같은 미국인 중 많은 사람이 우리에 대해 잘못 알고 있는 것과 같은 이유일 것입니다. 우리에게 원하는 것이 있었다면, 당신들에게는 너무 많이 너무 급하게 원하는 것이 있습니다. 지금은 나도 알았고, 내 친구들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죄는 바로 조급증이었다는 것을. 몇몇 사람은 이것을 돌려서 신뢰의 결여라 일컫습니다. 하지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참을성이 부족했던 것이며, 하룻밤 새에 우리의 마음을 채우려는 욕망이었습니다.”

백정묵은 이마에서 검은 머리카락을 쓸어내리면서 말했다.

“지난 2년 동안 내가 평생 만날 수 있는 미국인보다 더 많은 미국인과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나는 당신들의 가장 큰 오류는 우리에 대한 정치적 기대에 있어 참을성이 없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당신들은 너무나 많은 것을 너무나 빠르게 원하고 있습니다.”

“외국인을 만날 때마다 내가 듣는 첫 번째 질문은 언론의 자유 곧 말의 자유와 출판의 자유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제가 북쪽으로 간 친구들과 비교했기에 그 답은 분명히 ‘그렇다.’였습니다. 지금 이 질문을 들으면 나는 이들의 바보 같은 얼굴을 후려갈기고 싶어집니다 … 언론의 자유, 말의 자유, 출판의 자유, 이런 자유, 저런 자유. 한국에서는 이제 그런 질문이 어리석습니다. ‘자유’라 불리는 친구는 아주 상대적인 것입니다. 지금 공산주의보다는 많은 자유가 있지만, 여전히 부족한, 우리는 시작할 만큼의 충분한 여유가 있습니다. 우리를 너무 강요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너무 빨리, 너무 많
이 요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백 기자는 “여기에 오래 머무는 동안 당신은 보게 될 것”이라고 했다.
40년이라는 장기간의 일본 점령으로 한국 정부 안에는 교육을 받은 사람이 거의 없었다. 이승만 정부는 8만 명의 정부 급여를 받는 정규직 경찰과 12만 명의 자치 경찰이 근무하는 지방 경찰을 구성했다. 인구 100명당 1명꼴의 경찰 인력이다. 한국의 많은 지역, 특히 시골의 경우는 경찰의 지배가 정부를 구성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경찰 조직을 누가 통제하는 지에 대해 조심스럽게 주시하고 두세 당파가 서로 경합하는 것을 선호했다. 그는 자신의 후계자를 공개적으로 지명한 적이 결코 없으며, 이 자신감 넘치는 노인에 대한 가장 비판적인 비판 중 하나는 자신을 둘러싼 다른 사람이 권력이나 명성을 얻
도록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지난 8월 선거에서 이승만 대통령은 52세의 이범석(Lee Bum Suk)을 부통령으로 임명했지만 이 위스키 중독자이자 전 중국 민족주의자가 갑자기 자기 개인의 인기를 추구하자 가차 없이 그를 낙마시켰다. 이승만은 한 83세의 인사로 대체했다.
그의 건강은 근본적으로 노쇠한 남성다운 기력으로 여겨지지만 이승만은 병들어 있다. 어느 날 오후에는, 사진사 앞에서 포즈를 취하면서는 갑자기 땀을 흘리며 뺨을 움켜잡고 약간 흔들릴 정도였다. 육군 외과 의사 출신인 보좌관은 그를 침실로 인도했다. 진단은 위염. 자기 기력에 대한 감각 장애는 만성 불면증으로 이어졌다. 그는 수면 시간이 2~3시간밖에 되지 않았다.


3월 북쪽

지난주 황폐화 된 서울은 34년 전 서울에서 개최된 독립선언 기념일인 ‘삼일절’(Sam Il Day)을 기념했다. 전날 밤 수백 개의 전등으로 장식한 전차가 신작로를 밝혔다. 시청에서 수천 명의 일본식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노래를 부르며 파고다 공원(Pagoda Park)의 주요 도로를 따라 횃불 행진을 벌였다. 과거 파고다 공원에서 한국인 애국자들이 일본의 압제에 대한 해방 요구를 저항적으로 선언했던 것이다. 학생들은 횡으로 질서 있고도 고양된 영혼의 행진을 펼쳤다.
그들의 연기 자욱한 오렌지 색 붉은 대나무 횃불 모양이 폐허가 된 진흙투성이 벽돌과 건물 콘크리트 벽으로 어두움 속에서 반사되었다.
이는 굳센 국민들, 특히 전쟁과 전투의 시험을 다 마친 군대에서 발견한 자긍심, 그리고 공동의 위험 속에서 발견한 단결력으로 그런 황량함 속에서도 축하할 수 있는 것이었다.
다음 날 아침 2만 명의 시민이 삼일절 연설을 듣기 위해 국회 의사당에 모여들었다. 암살자 잠입을 감시하는 무장한 경찰은 교대로 군중들과 얼굴을 마주쳤고, 평범한 사람들은 국회 의사당 건물 기둥 뒤에서 들여다보았다. 정작 이승만은 보이지 않았다. 그의 지병이 그를 집에 잡아두고 있었다. 그러나 연설자의 연단 위로는 거대한 현수막이 다음과 같은 그의 반항적인 메시지를 선포하고 있었다.

MARCH NORTH—UNIFY THE COUNTRY WITH THE SPIRIT OF SAMIL.
3월 북쪽(북진하라)! – 삼일(SAM IL)의 영혼으로 나라를 통일하십시오!

황량한 황혼을 향한 북진(Marching north)은 마침내 그 밤에 진정한 독립정신 속에서 안남창 여사와 그녀의 작은 가족을 문산으로 데려다 주었다. 그것은 음력 새해 첫 보름달이 뜬 날이었으며, 오랜 관습에 따라 농민들은 딱딱한 한국 호두를 열어서 자신들의 미래를 예고했다.
한국은 전쟁으로 황폐해졌음에도 여전히 미래가 있었던 것이다.
호두 알맹이가 전체적으로 쏙 빠져 나왔다면 그것은 좋은 징조였다.
다른 한편으로, 그것들이 부서진다면, 그것은 나빠졌지만, 그렇다고 절망적인 것은 아니다.  


번역 : 이영진 (호서대학교 평생교육원 신학과 주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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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 a refugee camp a few miles outside Seoul last week, Ahn Nam-chang and her family were getting ready to go home. Nam-chang's husband was one of at least a million South Korean civilian casualties in the early days of the war, but she has a hunch that her old father is still living on his two-acre farm near Munsan. Nam-chang has three children. As if that were not enough, she has adopted a little girl—one of Korea's 100,000 war orphans—who would most likely have died if Mrs. Ahn had not taken her in. The U.N. Civil Assistance Command has been looking after the Ahns for a couple of years; the kids are outfitted in olive-drab pants. Mrs. Ahn wears a dogskin neckpiece, a relic of the old days, of which she is very fond; at 31, a widow in a country where widows are unwanted, Mrs. Ahn has not much to look forward to, but if she can find her father, they will make a home.

On the roads that wind from Seoul to Munsan, to Uijongbu and farther east, in central and eastern Korea, many families like the Ahns were on the move last week. In a thousand hamlets and settlements, some within sound of artillery on the stalemated battlefront, the blue-grey ashes of prewar villages were being raked aside, raw pine uprights were being planted, and women & children were combing through the rice straw for thatching for new roofs. Of the 22 million people in South Korea, about a fourth are homeless. No matter how hard and hopefully they work they cannot soon replace their 600,000 destroyed homes, nor provide the 250,000 new dwellings necessary to shelter the refugees from the north. 


North & South. 


After nearly three years of war, there is not much left of Korea. North of the 38th parallel the devastation is immense. U.N. intelligence estimates that bombing and strafing have destroyed 40% of all habitations of any kind; U.N. bombers no longer have profitable targets. The civilian population has diminished from 8,000,000 to perhaps 4,000,000—killed in the bombing, dead from malnutrition or cold, fled to the South for freedom, or carried off by the Communist occupiers. The North Korean army is a shadow: perhaps only 50,000 soldiers remain of their once formidable corps. The North Koreans have been beaten; it is their occupiers, the Chinese Communists, that U.N. armies now face.

In South Korea, the military picture is better, thanks to the might & main of the U.S., to the lesser but nonetheless real help of 14 other U.N. nations, to the tenacity of the South Koreans themselves, and to the singular dedication of Korea's first & only President, Syngman Rhee. A 400,000-man ROK army, including twelve fully equipped divisions in the line, guards the young republic from further invasion and is building so fast that it may soon be strong enough to take over the whole front. It already holds more than half. 

But back of that line, shadows gather in the picture. Destruction is widespread. 

The capital city of Seoul is 80% uninhabitable. Public buildings everywhere lie in ruins, public utility services are makeshift, and two-thirds of the schools are unusable. Only in the South's gaunt era of Reconstruction after the Civil War is there a U.S. parallel to what Rhee and his people are up against. The economy is shot to pieces. Some 75% of all mines and textile factories have suffered severe damage. Those industries which can function lack parts for maintenance and equipment for repair. The draft has absorbed much of the country's youth, but there are still thousands of unemployed. Resourceful businessmen struggle with makeshift merchandise: they offer for sale cooking utensils fashioned from the aluminum of wrecked planes, buckets beaten out of old oleomargarine cans, canoe-shaped rubber sneakers made from worn-out truck tires, men's & women's clothing cut from discarded (and pilfered) U.S. Army uniforms. 

A newly arrived U.N. officer, after a first look at Korean fashions, cracked: "U.S. olive drab seems to be the Korean national color." With thoughts hardly less superficial, thousands of soldiers have moved backwards & forwards over this small republic (slightly smaller than Indiana), fighting its invaders, and sometimes laying down their lives in its defense. Overwhelmed by the physical aspect of war, they have no means of assessing the stark inner tragedy. The U.N. soldier does not know that a Korean schoolteacher's salary will buy her only 16 lbs. of uncooked rice and ten cups of coffee a month; that a Korean doctor sells penicillin on the black market because his income is less than $10 a month. 


Won & Lost. 


Last week in a moldering, pagoda-roofed hall in Pusan, once used by Japanese occupiers as a wrestling arena, South Korea's National Assembly met to consider measures for halting the galloping inflation which has made a sad joke of wages and salaries. Diesel oil and kerosene fumes from six U.S. Army space heaters mingled with the heavy smell of garlic in the rear of the hall, where several hundred curious but impassive spectators watched the proceedings.

Nine days earlier the government had announced a very simple expedient for curing inflation: withdraw the present currency (won) and replace it with a new currency (hwan), at 100 won for one hwan. The question which occupied the Assembly was what proportion of existing bank deposits would be temporarily blocked from this trade-in. As the government worded the bill, a wide assortment of Koreans, from black-marketeers to most of the political opposition, would have 75% of their funds frozen. 

Finance Minister Paik To Chin, poised and confident in a neat brown business suit, thought he had the Assembly exactly where he wanted it. Then the Assembly threw its bombshell: practically all existing won, it decided, should be convertible into hwan. Rather than have any part of their own private funds blocked, many Assemblymen were prepared to wreck the government's chances of curbing inflation. 

The fact that there was a semblance of order at all—in finance or in government—was still something of a miracle. It was due, in almost every respect, to a remarkable old man: President Syngman Rhee, 78, stern fighter for Korea's freedom over more than half a century. 


The Uncrackable. 


Syngman Rhee is the walnut of Asian politics. Brown, wrinkled, iron-shelled, he calmly resists the tremendous pressure of managing his tragic country.

Seated a few yards from him, the visitor does not notice the marks of strain—the extended eyelids, the twitching right eye, the flaccid skin—but sees only the hard, skeptical eyes, the restless energy of the small frame. Rhee is the last of the old heroes of the Korean struggle for independence, a man with long memories. Just outside Seoul lie the ruins of Westgate prison, where the Emperor Koh-Jong's jailers spliced Rhee's fingers between wooden wands which the jailers twisted until his fingers were almost ripped from the joints; there he was imprisoned for seven years. 

As a youth, Rhee had attended the Pai Chai Methodist Mission school, and now the missionaries and their wives visited him in jail. There he became converted to Christianity. When the Japanese took over Korea in 1904, Rhee was released in a general amnesty and immediately went to the U.S. For six years he studied in American universities, got an M.A. from Harvard and a Ph.D. from Princeton. Back in Korea, while heading up a Korean Christian student movement, he began undercover agitation against the Japanese. When the conquerors got his number, he slipped off to Hawaii in 1912. He was to be an exile from his native land for 33 years. 


Head Worth $300,000. 


In Seoul the revolutionaries set up an underground provisional government, named Rhee as first president in absentia. The Japanese began a bloody purge of the nationalists and put a price of $300,000 on Rhee's head. At a conference in Shanghai in 1920 the Korean nationalists laid plans for organized military action against the Japanese. Later, when the Japanese army attacked Manchuria, a 20,000-man Korean national army fought beside Chinese soldiers.

None of these events have, been forgotten by Korean patriots, for whom the national struggle for independence is as much in living memory as the American Revolution was in the minds of Americans in the early 1800s. Thus, to his countrymen, Rhee has something of the stature of George Washington; and if his people have not yet heard of a Korean Thomas Jefferson, it is because the political climate of Korea (and Rhee himself) is against the free development of such a typically democratic figure. 


Vigilant Momma. 


In 1932, while attempting to put Korea's case before an indifferent League of Nations in Geneva, Rhee met Francesca Maria Barbara Donner, 34, the daughter of a family of Viennese iron merchants. Two years later they were married in a Methodist ceremony in New York. The Rhees live in a modest mansion on the rolling hillside behind Seoul, only 30 miles south of the front. In their household Madame Rhee maintains constant vigilance.

A small, alert woman with greying hair and bright hazel eyes, she has lost none of her Viennese animation. Her billowing dresses are tailored for an Austrian peasant effect. She talks lightly of Washington society, Hong Kong social intrigue, New York or Paris fashions. But the observant visitor is not misled: Madame Rhee is a woman attuned to politics and power. She is present, or in the background, of most vital meetings. When she and Rhee met, their common language was English. Today she professes to have forgotten the German of her youth, and her English is so much better than Rhee's that she often helps him out in difficult interviews. She also speaks what she calls "kitchen Korean." In that language she needles the President's lagging stenographers and orders his luncheons, and keeps tab on Rhee's police organization. Korean generals and politicians pay her immense deference. 

Never Underestimate . . . The extent to which Madame Rhee influences Korean politics is a matter of fascinated conjecture for all who have seen the Rhees together. Some have even gone so far as to say that Madame Rhee is the power behind the presidency, but the truth seems to be that the couple act in concert; in her own right Madame Rhee is a clever, strong, ever-watchful helpmate. At home and in politics it is "the Rhees," a political relationship like that which once existed between Madame and Generalissimo Chiang Kaishek. 

Rhee's day begins at 6 with a Western-style breakfast of toast, coffee, ham & eggs, after which the President likes to walk his Chin-do dog through the garden. He then goes through the newspapers with his secretary and scans reports from his embassies and ministries. Last week he received a letter written in blood purporting to be Acting Premier Paik To Chin's confession that he was a Communist. Rhee spotted the letter as a fraud, and investigation disclosed that it had been written in chicken blood by the madame of a Seoul tea house at the instigation of one of Paik's enemies. No detail is too small for Rhee's personal attention. 

After his correspondence, the President, as he says, "settles down to the day's work," which may include 30 to 35 interviews or an official tour. Time & again he has climbed in & out of planes and jeeps on tours of the freezing Korean battlefront, stood stiffly to attention during the playing of the Korean or U.S. national anthems, the wind winnowing his thin white hair, his battered grey felt hat clutched to his breast. But on other occasions, particularly when he is tired, the aged President will droop. Whenever Madame Rhee thinks that a visitor has over stayed, she will interrupt with some such remark as "Poppa, do you haff coffee or tea this afternoon?" Hearing her voice, Rhee's thousand-wrinkled face will crease into a smile. In private the President calls Madame Rhee "Momma," and in recent months he has needed all her solicitude. 

Government, as Rhee practices it, is almost a one-man job. He has a few trusted cabinet ministers, such as Acting Premier Paik To Chin and Information Minister Clarence Ryee. Below them are a number of lesser ministers and government officials who cautiously conform to Rhee's wishes. Government favors can be obtained only through Rhee and this circle of his intimates. All foreign exchange allocations for more than $500, for example, must be personally approved by Rhee. Imposed to ensure the strictest honesty in government operations, this control has its drawbacks: important decisions inevitably await the President's approval, and when he is incapacitated they await his recovery. Said a Rhee official last week: "When the old man is sick, Korea is sick." 


Sovereign Trust. 


In pursuing this policy, Rhee may well be moved by real distrust of Korea's manipulating politicians. But there is something more to his actions than counter-manipulation: his passionate belief that he governs by sovereign right conferred on him by the Korean people. This belief he clearly demonstrated in his row with the National Assembly last year. According to Korea's five-year-old constitution, the Assembly elects the President. Rhee's term being about to expire, the Assembly wished to exercise its constitutional right. Since the majority were opposed to Rhee, this meant a new man in the job. Among the aspirants was ex-Premier John Myun Chang, a U.S.-educated (Fordham) intellectual.

Rhee insisted that the President should be chosen by vote of the people. The Assembly said no. Rhee declared martial law, had his cops arrest twelve Assemblymen, charged them with being Communist plotters, and sent a mob of his supporters to storm the Assembly chamber. Aspirant Chang took refuge in a U.S. Army hospital. Rhee threatened to pull out a couple of ROK divisions from the line to back up his police, hesitated only when his good friend, Eighth Army Commander Van Fleet, flew to Pusan and told the President that this would mean an open rupture with the U.N. forces. When the Voice of America commented on his action, Rhee cut it off the air and invoked a censorship of news and publications. To an official note of protest from the U.S., he retorted: "I know you don't like me and I don't care." The truncated Assembly finally voted him an extension of his term, and in the August elections (which U.N. observers deemed fair) the people voted Rhee back into the presidency by an overwhelming majority. Thus his claim to sovereignty was justified. 


Democracy's Price. 


In conversation Rhee defends his attitude by saying: "The Assembly can be bought by anyone—by anyone." So far, the internal Communist threat in South Korea, except for guerrillas, has been confined to minor sabotage and espionage. But, with a huge Chinese Communist army still in North Korea, the threat is real.

The great strength of Syngman Rhee is his single-minded devotion to his country and its independence. This leaves him with no illusions whatever about Communism. Says Rhee: "It is perfectly clear to me that Communism can be defeated only by war . . . What we must bring about is the one event that the Soviet system cannot survive—a setback, a defeat. It must be a defeat that cannot be concealed from the people of Russia and the satellite countries. If we ever manage that, the system will fall. The people of Russia and the satellites will rise and throw off Communism; of that I am convinced. But they will never do it unless the fears and weaknesses of the Communist regime are exposed, and this can only be done by a military defeat, not by a political defeat. Our only chance of escaping a third world war is to inflict such a defeat in one of the little wars, perhaps this war." 

When the peace talks began in Kaesong nearly two years ago, Rhee denounced them as another Communist trick, and added, blusteringly, that if the U.N. were to sign a truce, the South Korean army would advance to the Yalu itself. Rhee's truculence is echoed by many Koreans, and for understandable reasons: without the power resources, the fertilizer factories and the iron mines of North Korea, the republic is doomed to economic mendicancy. When President Eisenhower visited Korea last December, Syngman Rhee insisted that the condition of any settlement must be unification of Korea. 


Oral Opposition. 


Before the Communists' invasion of South Korea in 1950, and again during the period when North Korean Reds occupied Seoul, South Korean intellectuals flocked north to the Communists like magpies to a ripe ricefield. For some the change was permanent: they are now entrenched with the Communist government in the north. But a few doubters elected to remain with Rhee's government and see what time would bring. During the past 18 months, those who remained have lost their doubts. In Pusan this week, in a coffee shop lighted by one feebly glowing electric light bulb, a reporter talked with a South Korean newspaperman who had planned originally to defect to the Communists, but who at the last minute had changed his mind. Critical of Rhee, protesting that the old man's stubbornness has cost his nation dearly, he, nevertheless, is a staunch Rhee supporter on the straightforward ground that Rhee is the strongest political force in Korea today.

Stocky, sharp-faced Journalist Paik Chung Muk, 38, is foreign-educated (Japan and Germany) and possessor of a biting intellectual intensity. Said he: "I read every work Harold Laski wrote. I worshiped him for years. Then I realized I was wrong. Now I am back on more solid ground." What had wrought the change? Paik downed the equivalent of half a jigger of Four Roses whisky from a cracked porcelain cup, chased it with a handful of warm pine nuts, and went on: "Many of my former friends are now with the Communists in the north. I almost went with them. Now I know why they—and very nearly myself—were wrong. It is the same reason so many of you, the Americans, are wrong about us. You want, and we wanted, too much too quickly. Now I know and my friends know that our crime was impatience. Some people turn this around and call it a lack of trust. But it was not that. It was impatience, a grinding desire to achieve our hearts' desires overnight." 

"Enough to Start With." Paik brushed away a strand of black hair from his forehead. He said: "I have talked with more Americans in the last two years than I thought I would see in my lifetime. Now I know that your greatest crime, in terms of political expectations from us, is impatience. You want too much too quickly. 

"Every time I meet a foreigner, the first question I am usually asked is something about freedom of speech, or freedom of the press. At first I used to try and explain that, compared with some of my friends who went north, the answer was definitely yes. Now, when I hear these questions, I would like to slap these people's stupid faces . . . Freedom of speech, freedom of the press, freedom of this, freedom of that. Here in Korea, now, such questions are idiotic. Freedom, my friend, is a very relative thing. Now we have a little—more than the Communists, but still not much. But we have enough to start with. Meantime, don't push us too hard, don't ask too much too soon." Paik added: "You will be here for a long time. You will see." 

In the Long Run. Forty years of Japanese occupation left Korea with few people trained in government. Thus, the Rhee administration rests upon 80,000 fulltime, government-paid national police and some 120,000 volunteer provincial police who are paid by the towns and villages where they work, i.e., about one cop to every 100 population. In many parts of Korea, particularly in the country, police rule constitutes the government. Thus, Rhee is cautious about who controls the police organization, prefers to have two or three factions contending with one another. In the same way, he has never publicly nominated his successor, and one of the severest criticisms of this proud old man is that he has let no one else around him gain power or prominence. In the election last August, Rhee named 52-year-old Lee Bum Suk to run as Vice President, but suddenly dropped this tough, whisky-drinking ex-Chinese Nationalist general from his ticket, when Lee seemed to be developing a popularity of his own. Syngman Rhee substituted an 83-year-old crony. 

Although his health is regarded as basically sound for so old a man, Rhee is ailing. One afternoon last week, while posing for a photographer, he suddenly broke out into a sweat, clutched his side and swayed slightly. Aides helped him to his bedroom, called an army surgeon. The diagnosis: gastritis. A graver impairment of his energy is his chronic insomnia, which often allows him only two or three hours sleep at night. 


March North. 


Last week devastated Seoul celebrated Sam Il Day, the anniversary of the Korean Declaration of Independence drawn 34 years ago in Seoul. On the night before, tramcars festooned with hundreds of electric light bulbs rocked along the main streets. From City Hall thousands of students in Japanese-style student uniforms marched singing and chanting in a torchlight parade down the main thoroughfares to the pavilion in Pagoda Park, where Korean patriots had defiantly proclaimed their demands to the Japanese occupiers. The student columns, marched in good order and high spirits.

Their smoky, orange-red torches of bamboo and pitch balls reflected off the somber, jagged ruins, dusty brick and grimy concrete of windowless, crumbling buildings along the line of march. It said much for a stouthearted people, the pride they had found in their new, battle-tested armies and the unity they had found in their common peril, that they could celebrate amidst such desolation. 

Next morning 20,000 citizens crowded into Capitol Plaza to hear the Sam Il Day speeches. Armed national police, on the watch for assassins, faced alternately towards and away from the crowd, while plainclothesmen peeped out from behind the pillars of the Capitol building. Illness kept President Syngman Rhee confined to his house. But over the speaker's platform a huge muslin banner proclaimed his defiant message: 


MARCH NORTH—UNIFY THE COUNTRY WITH THE SPIRIT OF SAM IL.


Marching north over the bleak, desolate, road to Munsan that night, in the true spirit of independence, but with no designs of conquest, was the widow Ahn Nam-chang and her little family. It was the first full moon of the lunar new year and, in accordance with age-old custom, peasant folk were cracking open the hard little Korean walnuts to foretell the future. No matter that Korea lay devastated by war, there was still a future. If the kernels came out whole, that was a good omen. On the other hand, if they came out broken, that was bad, but not hopel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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