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LE FIGARO지 와의 인터뷰 (1958년 10월 3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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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8년 10월 31일에 파리의 르 피가로 지(LE FIGARO)의 세르주 그루사르(SERGE GROUSSARD)가 제기한 질문에 대한 이승만 대통령의 답변
1958년 10월 31일 프랑스 르피가로(Le Figaro) 지의 그루사드(Serge Groussard)가 제기한 질문에 대한 이승만 대통령의 답변 서한이다. 한국의 역사와 특징, 한국의 전후 복구와 재건 현황, 자신의 사상에 대한 기독교와 유교의 영향 등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질문 1. 한국 – 역사와 특징
답변 1. 한국은 4,000년이 넘는 기간 동안 문명국이었으며, 이는 사실이며 신화가 아닙니다. 특히 최근 몇 세기 동안에 걸쳐 일본에 맞서서 몇 차례 자국의 생존을 위해 싸울 수밖에 없긴 했지만, 한국은 한 번도 적대적인 전쟁을 개시하거나 이웃나라를 침략한 적이 없습니다. 한국인들은 유순하지는 않지만 늘 평화로운 국민들이었습니다.
초기에는 중국의 황제들과 장군들은 이따금씩 한국에 왔었지만 보통은 그러한 침략을 물리치거나 얼마 가지 못했습니다. 공자의 유고체제 하에서는 외부 사람들은 야만인으로 간주되었으며 이는 대부분 사실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유교 철학으로 인해 한국은 대부분의 고대 중국 왕조를 통해 문명국 대우를 받았습니다.
물론 한국은 중국에서 일본으로 가는 주요한 가교였습니다. 그 가교를 통해 한국과 중국 문명의 가치가 옮겨졌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가교는 두 가지 용도로 사용될 수 있습니다. 그들이 야만으로부터 벗어나는 순간부터 일본은 섬에서 본토로 피난을 했으며 한국이 그 관문이었습니다. 노르인들이 한 때 영국과 프랑스의 해안을 습격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처음에는 공격이 그 주요한 본질이었습니다. 일본인들은 침략자이며 약탈자였지만 그들은 늘 한국의 해안으로부터 밀려났습니다. 1592년에 일본의 군지도자인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중국의 명 왕조에 대항하여 한국에게 동맹을 청했지만 한국은 이를 거절했습니다. 그에 따라 일본은 한반도를 침략했지만 이순신 장군의 거북선 -- 세계 최초의 철갑선 -- 이 일본 함대를 패배시키고 연전연승함에 따라 철수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1598년경 일본은 물러갔고 이후 300년 동안 한국은 동북아시아에서의 일본의 팽창정책을 막아냈습니다.
페리 제독(Commodore Perry)은 1853년에 일본을 서구의 영향에 문호를 열어주었습니다. 현대적인 무기와 그 사용기술을 재빨리 획득한 일본은 곧 한국, 중국, 러시아에 도전하고 결국에는 미국에도 도전을 하게 되었습니다. 한국은 1880년대까지는 서구세계에 문호를 개방하지 않았으며 그 때쯤에는 일본의 침략자를 격퇴할 만큼 충분한 속도로 현대화하기에는 너무 늦은 때였습니다.
약하고 보수적인 왕의 통치하에 있던 한국은 일본의 음모와 정치적 술책에 성공적으로 대항하지 못했습니다. 동시에 중국은 친중 정책을 유지하라고 한국의 왕을 위협하고 있었습니다. 러시아와 일본의 충돌이 더욱 심각해짐에 따라 일본은 한국과의 공격 및 방어 동맹을 체결하는데 성공했습니다. 이로 인해 러일 전쟁과 한반도 점령으로 발전하는 길이 열렸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 일본은 서양으로부터 얻은 힘을 이용하여 우선 한국에 대해 보호국을 선언하고 한국을 완전히 병합시켰습니다. 1882년 조약에서 한국의 독립을 유지하는데 도움을 주는데 미국은 동의를 했지만 서구 열강들에 대한 항의는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한국인들은 결코 일본인들의 통치를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일본에 대항하여 일으켰던 1919년의 만세 운동은 세계 역사상 폭정에 항거하는 가장 큰 수동적인 저항운동 중 하나였습니다. 결국 1945년에 일본의 패배로 해방이 찾아왔지만, 미국과 러시아가 임시적인 편의상 38도선으로 우리나라를 분단시켰기 때문에 이는 반쪽의 해방이었습니다.
이후 공산주의자들은 남한을 점령하려고 1950년에 한국전쟁이라고 알려져 있는 침략을 개시하였습니다. 전쟁에 유입된 중공의 인해전술에도 불구하고 한국과 16개국들은 유엔의 참관 하에 시행된 자유선거의 결과로 수립된 대한민국의 통제 하에 힘을 합쳐 영토 방어에 성공했습니다.
대한민국이 당사자가 아니었던 이 불행한 정전협정이 체결될 때 공산주의자들은 완전히 패배할 시점이었습니다. 이로써 적들은 재편성을 해서 군을 현대화할 기회를 잡았고 오늘날 과거의 침략적인 행동에 대해 유감의 표시도 거의 보이지 않고 오로지 아시아의 패권을 다시 추구하고자하는 징후를 농후하게 보이는 일본의 위협이 되살아나고 있습니다. 우리는 아직도 일본과 우호적이고 협력적인 관계를 수립하고자 노력하고 있지만 발전은 미미하고 극히 느립니다.
한국의 강인한 특징은 우리 문화의 독특함과 동질성, 심오한 감각의 국민 정서, 기독교, 유고 및 불교의 영향의 혼합 등과 같은 수많은 요소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우리의 목표인 국가의 독립, 개인의 자유, 정의, 평등, 평화와 강하고 번영된 나라 등은 싸워서 얻을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공산주의의 패배와 우리나라의 통일로 이 모든 것을 이룰 수 있습니다.
질문 2. 한국은 고통을 겪고 난 후에 어떻게 다시 일어섰는지요?
답변 2. 복구와 재건은 아직 완전하지 않으며 통일이 달성되리라는 보장도 전혀 없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발전을 이룬 것만큼은 사실입니다.
이는 아마도 미국과 유엔의 다른 국가들의 너그러운 지원 덕분에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나라 국민들도 큰 공헌을 했습니다. 그들은 황폐화된 국가의 현실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했으며 열심히 일해 왔고 국가를 재건하고자 하는 열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총격전이 벌어지는 적대행위가 종식될 당시에 여기에 있었던 사람들은 어떻게 이렇게 많은 것이 이루어졌는지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가 통일이 되어 산업이 발달한 북쪽과 농업을 주로 하는 남쪽이 통일이 되지 않는 한 한국은 자립할 수 없고 진정한 잠재가능성을 달성할 수 없음이 점점 더 분명해지고 있습니다. 이는 또한 우리의 병력이 감축될 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하며 -- 이는 국가 방위에 대략 우리나라 국가 수입의 절반이 필요하다는 점을 고려할 때 가장 중요한 핵심입니다.
우리는 현재 우리의 군사적 편제를 축소시키기를 바라고 있지만, 그것은 자살행위가 될 것입니다. 이는 1940년대 말에 미군이 철수하고 우리에게는 소규모 정찰대만을 남겨 놓을 때까지 그랬듯이 공산주의자들이 기다리고 있는 바입니다. 그때 그들은 공격을 했으며 준비가 안 된 대가는 우리에게 뿐만 아니라 우리의 방위를 위해 모여들었던 친구들에게도 비극이었습니다.
모든 한국인들은 그들의 고통과 그의 조국의 고통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비관주의적인 견해라기보다는 낙관주의적인 견해인데, 그 이유는 경험을 통해 전 세계적인 공산주의 문제가 처리될 때까지는 평화도 안보도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오래 기다리면 기다릴수록, 적들은 더욱 강해지고 최종적인 비용은 더 크기 때문에 한국의 의견은 가능한 한 최종적인 결말을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우리의 국가적 결정은 프랑스의 결정과 그리 많이 다르지 않습니다. 몇 달 전에, 위대한 프랑스라는 나라가 붕괴하고 있었지만 지금은 모든 것이 변했고 그 주요한 요인은 프랑스 사람들이 그렇지 않기를 원했다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한국 국민들은 강한 운명적 정서를 가지고 있으며, 장래 역사에 어떠한 시련이 있더라도 그 시련과 계속 싸워나갈 것입니다.
질문 3. 이 대통령의 윤리와 삶의 가르침
답변 3. 저는 제 윤리가 기독교 신앙과 유교적 철학체계가 결합되어 있다고 생각하고 싶습니다. 기독교는 사랑과 형제애와 봉사의 종교입니다. 이는 개인에게 성취감을 줍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러한 숭고한 열망이 집단적 행동, 즉 현대적인 국가들의 역할과 관련이 있다는 점입니다. 이는 유교철학에 대한 존중으로 이루어지며, 이는 전 세계 국가들이 모인 통일된 기구로 이어집니다.
제게는 삶의 가장 소중한 선물이 수많은 국민들과 개인들의 자유를 위한 국가의 독립입니다. 그러나 이런 선물들은 이들의 희생이 없이는 있을 수 없는 것이며 그 대가는 자기수양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질서 있는 삶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며 모든 것은 무정부상태가 될 것입니다. 나라나 개인이 자기수양을 거부한다면 집단적인 의사의 구속을 받아야만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국제질서를 위해 집단안보의 개념을 가지고 있으며, 시민들 개인을 위해 경찰과 법원이라는 개념을 보유하고 있는 것입니다.
국가나 개인의 자유는 다른 사람들의 일에 관여할 수 있는 권리와 동등하게 다루어져서는 안 됩니다. 바꾸어 말하면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우리에게 하기를 바라는 대로 다른 사람에게 하는 황금률을 따라야 하는 동시에 반대로 우리가 다른 사람이 우리에게 하지 않기를 바라지 바를 다른 사람에게 하지 말아야 한다는 유교의 원칙을 적용해야 합니다. 이 원칙을 긍정적으로 적용하는 것이 부정적으로 적용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는 주장은 그 핵심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 두 가지 의미와 의도 모두가 필요합니다.
귀하께서는 제 삶의 가르침이 인간은 본질적으로 선한 것이라고 말씀하실지 모르겠지만 나쁜 사람들도 역시 존재하며 우리가 우리 자신과 자녀를 위해 원하는 삶을 영위하려면 이런 사람들을 통제해야 합니다. 우리가 겪는 고통과 비극의 많은 부분이 빠른 시간 내에 충분히 이러한 통제조치를 취하지 못한데서 비롯된 것이며, 그러한 것들이 우리 자신 대신에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경우는 매우 드뭅니다.
이제 파괴에 대한 우리의 잠재가능성이 상당히 커졌기 때문에 우리는 국제적인 범죄를 용인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이제 이를 뿌리 뽑아야 하며 모든 사람들을 위한 평등, 정의, 자유와 기회의 세계를 건설해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곧 -- 우리가 최근에 그로부터 빠져 나온 권위주의의 난국으로 빠져 들어가서 -- 예속의 세계로 들어가거나 우리가 사는 세상은 아예 존재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출처] 대통령기록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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