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세계를 경악시킨 벼랑 끝 전술 - 반공포로석방 (反共捕虜釋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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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 6월부터 자유진영과 공산진영간의 정전협정 논의가 시작된다. 전쟁에 지친 미국은 이승만에게 휴전협정에 찬성하라는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했다. 그러나 우남(雩南) 이승만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미국이 휴전을 원한다면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과 병력 증강이 선행돼야 한다고 버텼다. 사사건건 독자 행동으로 치닫는 우남에게 미 국방성은 드디어 칼을 빼 들었다. 일명 ‘상비군 작전(Operation Everready)’을 통해 우남을 제거하려 한 것이다. 이승만을 권좌에서 밀어내려는 미국의 시도는 세 번이나 있었다. 그 시도는 53년 7월 휴전이 서명될 때까지 계속된다.
당시 미국은 내부적으로 반전운동이 맹렬했다. 5만여 명의 젊은이들이 한국전에서 죽어나가는 것을 목도한 미국 국민은 아이젠하워를 대통령으로 당선시켜 전쟁을 끝내라고 촉구했다. 파병 규모가 두 번째로 큰 영국도 예외는 아니었다. 중국 대륙을 장악한 마오쩌둥 군대가 영국 지배하의 홍콩으로 언제 밀려들지 몰라 처칠은 전전긍긍했다.
그 당시 미국이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을 싫어했던 것은 당연했다. 일단 조약이 체결되면 전세가 불리해지더라도 국제법이나 국제 여론 차원에서 군대 철수는 쉽지 않다. 최악의 경우 한반도에서의 전쟁이 세계 전쟁으로 비화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미국은 동북아에서 일본 중심의 국제 질서로도 얼마든지 공산주의를 견제할 수 있다고 믿었다. 따라서 미군이 구태여 한반도에서 발목 잡힐 이유가 없다는 것이 당시 미 국무부의 판단이었다. 한미상호방위조약이 아닌 한국에 대한 단순한 병력 지원과 군사 원조가 미국의 국익에 부합된다고 본 것이다.
그러나 이승만은 한미상호방위조약의 문제를 대한민국의 생존 차원에서 접근했다. 한국의 안전보장이 담보되지 않은 휴전은 시쳇말로 ‘청명에 죽으나 한식에 죽으나 죽는 것은 하루 차이’라는 사즉생(死卽生)의 각오로 달려든 것이다. 휴전이 되어버리면 말로만 떠들어대던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 문제는 급격히 동력이 떨어질 것으로 우남은 내다봤다. 이에 대해 국회도 이승만을 지지해 주었다.
1953년 4월 9일 마지막으로 이승만은 휴전에 대한 정식 항의문을 트루먼에게 보냈다. 만일 중공군을 북한에 둔 채 휴전협정을 체결한다면, 한국은 통일을 위해 단독으로 북진할 것이라고 밝혔다. 왜냐하면 한국은 또다시 남침을 당할 것이기 때문이다.
1953년 4월 23일 이승만 대통령은 다시 양유찬 주미대사를 통해 미국을 협박했다. 만일 이러한 한국의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은 상태에서 휴전이 된다면, 한국군을 유엔군으로부터 빼내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휴전의 방침을 굳힌 미국과 유엔은 강행할 계획이었다. 이승만은 미국과 유엔이 한국정부의 의사를 묻지 않고 멋대로 휴전을 하려는 데 대해 분개했다.
특히 유엔 측이 북한이나 중공에 가지 않으려는 반공포로들을 중립국 송환위원회에 넘겨 각자의 운명을 결정하도록 하겠다는 공산측의 요구에 양보한 데 대해 분개했다. 그렇게 되면 북한에 돌아가지 않으려는 반공포로들이 친공적인 중립국 대표들의 압력과 설득으로 북한으로 다시 끌려가 위험이 크기 때문이었다. 중립국 가운데서도 특히 친공적이고 친소적인 인도의 군대가 모든 경비를 맡게 될 것이 문제였다.
그러므로 이승만은 인천항에 도착한 인도군의 상륙을 거부했고, 그 대문에 인도군은 미군의 헬리콥터를 이용해 판문점 지역으로 이동할 수 밖에 없었다.
▲ 당시 포로수용소의 모습
마침내 이승만은 미국과 유엔이 제멋대로 반공포로 문제와 휴전 문제를 처리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극적인 행동에 나섰다. 그는 개인적으로 신뢰하는 헌병사령관 원용덕 장군에게 비밀리에 반공포로 석방을 지시했다.
1953년 6월 18일 새벽2시 전국의 여러 수용소에 나뉘어 있던 2만7천명의 반공포로들은, 한국군 헌병들이 쏘는 카빈 총소리를 신호로, 일제히 철조망을 뚫고 탈출했다. 포로들은 순식간에 빠져나와 경찰들이 안내하는 민가에 숨었다. 이승만의 끈질긴 승부사적 기질이 빚어낸 아주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또한 모든 과정이 치밀하게 계산된 것이었다. 한국의 공무원이나 경찰은 이들에게 직접 민간인이 입는 옷을 제공했고, 안내까지 해서 민가에 숨어있도록 조취를 취했던 것이다.
반공포로 석방 다음날인 6월 19일 이승만은 자신이 포로석방을 단행하였다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나는 나 자신의 책임 하에 1953년 6월 18일 한국인 반공포로 석방을 명령하였다. 내가 유엔군사령부 및 관계당국과 충분한 협의를 하지 않고 이렇게 한 이유는 너무도 분명하여 설명을 요하지 않는다. 각도의 지사나 경찰관서에 최선을 다하여 이 석방포로들을 돌보도록 지시하였다. 우리는 우리 국민과 친구들이 이 조치에 협력할 것이며, 어디에서나 불필요한 오해가 없을 것이라고 믿는다.... 제네바협약과 인권정신에 의하여 반공 한인포로는 벌써 다 석방되어야 할 것인데...... 국제관계로 해서 불공평하게 그 사람들을 너무 오래 구속했었다....”
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오래도록 협상해온 휴전을 물거품으로 만들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승만의 반공포로 석방은 휴전을 목마르게 기다리던 연합국 측이나 스탈린의 죽음으로 맥이 빠져 있었던 공산 측 양쪽 모두에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다.
이 소식을 듣는 순간 면도기를 떨어뜨린 것을 알려진 영국수상 처칠은 극단적인 용어로 이승만을 비난했다. 아이젠하워는 훗날 회고록에서 "대통령 재임 8년 기간 중, 자다가 일어난 건 그 때가 유일했다."라고 했다. 심지어 중공 대표 우슈취안(伍修權)은 적국인 미국과 힘을 합쳐 이승만을 고립시켜야 한다고 까지 했다. 그들은 이 사건을 통해 이승만을 ‘북진 통일을 위해서는 무슨 일이라도 저지를 수 있는 예측 불가능의 인물’로 인식하게 되었다.
놀랍게도 이 사건으로 인해 우남에게는 엄청난 협상력이 생겨났다. 반공포로 석방 이틀 후 우남은 클라크 유엔군 총사령관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 일로 미국이 한국을 떠나겠다고 하면 떠나도 좋다”고 말한다. 그러나 “한국을 공산주의자들에게 넘겨주는 일은 삼가라”며 역으로 반공포로 석방의 책임을 미국에 떠넘기고 있다.
결국 미국은 이승만을 달래지 않고는 휴전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미 대통령 특사로 한국을 방문한 로버트슨은 우남을 면담하는 자리에서 미 상원의 한미상호방위조약 인준을 확약시켜주기에 이른다. 하지만 이 대목에서 외교책략가 이승만의 진면목이 나타난다. ‘휴전협정 준수’를 요구하는 미국 측에 끝까지 시원한 대답을 해주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는 휴전을 ‘방해하지 않겠다’라는 정도의 기록만을 남겼다. 그는 끝까지 의심의 눈초리로 미국이라는 강대국의 관심을 끌고 갔던 것이다.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은 그 후 자신의 회고록에서 우남을 평가하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승만은 ‘너무나 마음에 안 드는 동맹자’였으며 ‘공산주의자만큼 미국을 힘들게 했던 자’였다고 회고한 것이다.
이승만은 휴전에 동의해주는 조건으로 한미동맹의 체결 및 경제 원조와 무기지원도 요구했다. 미국과 협상이 진행되는 사이 우남은 한국에 대한 미국 국민의 동정 여론을 불러 일으키기 위해 자극적인 성명서를 여러 차례 발표하여 여론을 조성한다. 예를 들면, 1953년 7월 4일 미국 독립기념일에는 지금 한국인들의 반공투쟁이 18세기 영국에 대한 미국인들의 독립투쟁과 같은 맥락의 것이라는 내용의 방송연설을 했다. 그 방송을 듣고 수천 명의 미국인들이 이승만에게 격려 편지를 보내왔다. 한미동맹 결성을 지지한다는 결의안을 채택한 주 의회들도 있었다. 허스트 계통의 신문들을 비롯한 우파 성향의 신문들은 지지 논설을 실었다.
반공 포로석방에서 휴전조인까지의 약 한 달간이야말로 이 대통령이 외교적 수완을 유감없이 발휘해 혼자 거대한 미국을 상대로 외롭게 투쟁하며 나라를 위해 필요한 거의 모든 것을 쟁취해낸 극적인 기간이었다.
결국 이승만은 미국 정부를 설득시키는데 성공했고 휴전에 동의해 주게 된다.
▲ 이승만 대통령의 초상화를 들고 행진하는 반공포로들. 예상치 못한 전광석화 같았던 반공포로 석방은 국내외에 많은 파장을 불러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