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까지 무국적자 신분을 유지한 독립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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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은 독립운동을 위해 외국에 나갔다가 미국으로 돌아갈 때마다 늘 출입국에 애를 먹었다. 한국이 일본에 강제병합 되면서 이승만도 다른 독립운동가들처럼 무국적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1932년 11월 상해임시정부의 김구 주석은 이승만에게 전권대사로 제네바에 가 줄 것을 간청했다. 이승만은 쾌락하고 미국으로 떠나려는데 재입국 비자가 나오지 않았다. 미국 국무성에는 이승만을 탐탁지 않게 여기는 관리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이승만은 예전에도 이런 일로 프린스턴 대학 스승이었던 우드로 윌슨을 찾아간 적이 있었다. 국무성 관리들이 재입국 허가를 안해준다면서 주선해줄 것을 부탁하기 위해서였다. 윌슨은 이승만에게 “간단한 방법이 있다.”고 했다. 미국 시민권을 신청하라는 것이었다. 이승만은 그건 말도 안된다며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이승만은 윌슨 대통령이 권해도 미국 국적을 끝내 얻지 않았다.
“대한민국이 독립되면 대한민국 국민이 될 테니까”라는 말이 그의 이유였다.
당시 서재필, 안창호, 김구, 김성수 등 독립운동가들이 모두 미국적, 중국적, 소련국적, 일본국적으로 살 때 이승만은 항상 무국적자였다. 특히 공산,사회주의계열 독립운동가들이 중국적,소련국적을 취득한 점과 많이 대비된다.
이승만의 일기 中 - 1933년 8월 8일
“영사관으로 가자 영사는 식사하러 가고 없었다. 나는 기다렸다.
영사가 들어오자 부영사와 함께 내 여권을 보더니, 내가 한국인인데 일본 여권을 거부하고 미국 시민도 아니면서 미국 여권을 발급받은 사실에 매우 흥미있어 하는 것 같았다.
그들은 내 여권이 많은 불편을 야기하기 때문에 외교 비자를 발급해 주겠다고 말했다...”(후략, 영문생략)
프란체스카 <대통령의 건강> 中
“미국무부는 지겨운 나머지 우리에게 미국시민권을 발급받으라고 말했다. 그러나 남편의 대답은 한결 같았다. ‘조선이 독립할 것이니 기다려주시오.’
그 때마다 나는 남편의 신념과 그 누구도 범할 수 없는 특유의 위엄에 언제나 압도당하곤 했다. 이 당당한 무국적자의 남편과 내가 이로 인해 겪은 고초는 대한민국 건국 때까지 계속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