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과 기업가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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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과 기업가 시대』‘성공한 나라’ 대한민국의 기초가 닦인 피와 땀의 15년
이승만 대통령이 대한민국의 기초를 닦은 15년간의 피와 땀의 기록을 담은 책이다. 이승만 대통령의 경제에 관한 업적이 학계의 전문가들 사이에 가감 없이 알려지고 정당하게 평가받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저자가 써내려간 내용들로 구성되어 있다.
<출판사 서평>
‘대한민국은 민족사적 정통성이 없으며,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나라’, ‘한국현대사는 정의가 패배하고, 기회주의가 득세한 역사’ 등의 부정적 역사인식이 우리 주변을 유령처럼 배회하고 있다. ‘대한민국 현대사를 부정적으로 인식하는 이들은 대개 역사를 미시적(微視的)·일국적(一國的)·도덕적(규범적) 시각으로 본다. 그들은 저항적·폐쇄적 민족주의의 연장선상에서 인류의 역사는 우리를 중심으로 돌아가고, 그래야 마땅하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그러면서 그들은 ‘있었던 사실로의 역사’를 보는 게 아니라, ‘있어야 했다고 믿는(상상하는) 당위(當爲)로서의 역사를 본다.’
대한민국의 건국(建國)과 부국(富國)에 있어 이승만과 박정희의 업적을 파괴, 왜곡하고자 하는 좌파적 시각의 학자, 운동가, 정치인, 지식인들이 무차별 공격한다 해도, 오늘날 우리 앞에 우뚝 선 ‘기적의 대한민국’은 결코 부정되지 않는다.
이승만은 무법천지나 다름없던 해방공간에서 좌익과 남한의 공산주의자, 미 군정과의 거센 투쟁에서 살아남아 대한민국을 건국했다.
이승만이 해방 공간에서 살아남아 건국 대통령에 오른 첫째 원인은 그에 대한 국민적 지지였고, 둘째는 미국의 엘리트 교육을 받은 국제정치학 박사로서 세계사의 흐름을 꿰뚫어보는 안목이었다.
6ㆍ25 남침을 당하자 이승만은 국군과 유엔군을 독려하여 남한의 공산화를 저지했고, 분단을 고착화하는 휴전협정에 반대하기 위해 반공포로 석방이라는 승부수를 던져 미국과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는 데 성공했다. 또 국군 20개 사단의 무장이라는 값진 결실을 얻어냈다. 이 땅의 역사상 현대화 된 60만 대군을 보유하게 된 것은 이때가 처음이다.
이승만은 한국 사회의 전근대성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반상(班常)의 구분, 그리고 지주와 소작인으로 질기게 이어져 온 지배-피지배구조를 무너뜨리는 것이 급선무라는 점을 깊이 인식했다. 그 결과 ‘농토는 농민에게 돌려줘야 한다’는 절실한 구상을 실천에 옮겼으니, 이것이 6·25 직전에 단행한 농지개혁이다. 학자들은 세계의 여러 나라 중 경제가 고속 성장하면서도 소득분배가 한국처럼 공평하게 이루어진 나라는 유례를 찾기 힘들다고 한다. 그 공로는 이승만의 농지개혁에서 찾아야 한다고 말한다. 농지개혁에 성공했기에 한국은 근대화 출범 초기부터 지주-소작인 간의 계급갈등이 존재하지 않는 균질한 사회로 출발했다. 그 결과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사회로의 이행 과정에서 첨예한 계급 갈등의 소지를 해소할 수 있었다. 나아가 베트남이나 필리핀에서처럼 농민 세력이 공산주의에 동조하는 현상을 미연에 방지하여 사회 안정에 기여했다. 이것이 이승만의 농지개혁이 우리에게 준 가장 큰 선물이다.
일제 식민지를 거치면서 우리나라는 조선조 500년 동안 뿌리 깊게 이어졌던 반상(班常)의 계급 구분이 느슨해졌고, 건국 후 농지개혁으로 인해 부자와 빈자(貧者)의 세습구조가 무너졌다. 전 국민이 계급 없고, 빈부 격차가 사라진 ‘차별 없는 시대’가 열림으로써 결과적으로 기회의 균등이 실현된 것이다.
이승만이 밑그림을 그린 한미동맹과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의 틀은 대한민국을 글로벌 시대의 주류세력인 해양 동맹에 편입시켰고, 이후 정권들은 이를 더욱 공고하게 다져 한민족의 위대한 분출구를 만들어냈다. 이 나라를 선진국의 대열에 올려놓은 인물들 중에서 일등공신은 온갖 악조건에도 굴하지 않고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해 온 기업가들과 국가의 진로를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로 이끈 이승만을 지목해야 할 것이다.
지금까지 이승만에 대한 다양한 연구들이 진행되어 선각자로서의 삶, 해외에서의 외교를 통한 독립운동, 좌익 폭동 속에서 자유선거를 통한 건국 과정 등이 상당 부분 밝혀졌다. 그러나 1948년 8월 15일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이래 1960년 4월 하야하기까지 12년 간 재임하면서 대한민국의 근대화와 산업화의 초석을 다진 부분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조명을 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 책은 그러한 이승만 대통령의 ‘성공한 나라’ 대한민국의 기초를 닦은 15년간의 피와 땀의 기록이다.
<책 속으로>
당시 산업기반이 부족하여 뭐하나 제대로 만들 수 없는 형편이었다는 사실은 이승만 대통령의 발언에서 그 편린을 엿볼 수 있다. 1958년 1월 14일자 국무회의록에 의하면 이날 이 대통령이 “풀브라이트 법에 의한 장학을 연구하여 우선 일상생활에 필요한 것을 만드는 기술을 우리 국민에게 가르쳐야 한다. 문 장식, 자물쇠 같은 간단한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변소도 외국인 같이 돈을 많이 들일 수는 없지만 냄새는 안 나게 하고 살아야 할 것이다. 이런 기술자가 없다. 관저(경무대) 2층에 변소를 고칠 기술자를 추천하여 주면 좋겠다”라고 발언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 시절은 화장실 고치는 기술자마저 부족했던 ‘결핍의 시대’였다.---p. 35
파란만장한 사연을 노정한 채 시행된 농지개혁은 토지자본의 산업자본화라는 차원에서 복잡한 문제가 노출됐다. 이것은 예기치 못한 전쟁이 가져다 준 산물이다. 그러나 농지개혁은 우리 사회 전반에 엄청난 파장을 몰고 왔다. 우선 공산화 예방이다. 농민들이 내 땅을 소유하게 됨으로써 베트남이나 필리핀에서처럼 공산주의에 동조하는 현상을 미연에 방지하여 사회 안정에 기여했다. 학자들은 세계 여러 나라 중 경제가 고속 성장하면서도 소득분배가 한국처럼 공평하게 이루어진 나라는 유례를 찾기 힘들다고 평한다. 그 공로는 이승만의 농지개혁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p. 116
제일모직도 제일제당처럼 대단한 성공을 거두면서 전후의 산업질서는 상업자본의 산업자본화에 누가 빨리 선착하느냐의 경쟁으로 이어졌다. 이병철의 제일모직 성공에 자극받은 기업가들은 앞을 다투어 대한모직, 한국모방, 경남모직 등의 회사를 창업했고, 다른 기업가들은 전시무역으로 축적한 상업자본을 투자하여 락희화학, 한국유리, 대한양회 같은 근대적인 산업시설 건설에 도전했다. ---p. 220
국민소득 60달러에 불과한 나라에서 미래의 에너지였던 원자력산업을 계획하고 실천에 옮긴 것은 국가 지도자의 통찰력이었다. 이승만은 그 어려웠던 시절에 노망이 들었다는 주위의 반대를 무릅쓰고 원자력산업의 기초를 닦았다. 또 원자력을 이용해 전력 문제를 해결한다는 차원에서 1958년 20명의 유학생을 선발해 영국으로 유학을 보냈다. 당시 유학을 다녀온 이동녕 박사, 이관 박사(후에 과기처 장관 역임), 김호철 박사(후에 카이스트 교수 역임), 현경호 박사, 김호길 박사(전 포항공대 총장) 등이 우리나라 원자력 산업의 기초를 닦는 역할을 하게 된다. 원자력 연구생의 해외 파견을 격려하는 자리에서 이승만이 직접 유학비를 유학생들의 손에 쥐어 주기도 했다. ---p. 304
지금까지의 상식에 의하면 대한민국 경제 발전의 상징인 ‘경제개발 5년 계획’은 박정희 군사정권이 쿠데타 직후 수립하여 시행함으로써 성공을 거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실상은 이승만 시절에 이미 경제개발계획이 수립되어 있던 것을 장면 정권의 제2공화국이 이어받았고, 박정희 정권 때 본격 추진하여 꽃을 피운 것이다. 이승만 시대의 경제적 조망에 있어 무엇보다 우선해야 할 점은 그 시절에 경제개발계획의 기초가 짜였다는 점을 관찰하는 일이다. ---p. 327
슘페터는 기업가 정신의 핵심을 새로운 제품, 자원의 새로운 개발, 새로운 시장, 새로운 조직, 기술혁신 등 다섯 가지라고 지적했다. 그러나 김입삼은 한국의 기업가 정신은 위의 다섯 가지 여건에다가 ‘기업가는 국가경제를 어떻게 발전시킬 것인가’ 하는 내용을 포함시켜야 한다면서 이렇게 주장한다.
“우리 기업가들은 고비마다 국가경제 발전을 위한 비전과 전략을 제시하고, 추진방법을 내놓았습니다. 이것은 다른 나라에서는 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한국 기업가만의 독특한 정신입니다. 우리는 왜 유독 한국에서만 이런 기업가 정신이 가능했는지 그 이유를 파헤쳐 학문으로 정립해야 하고, 세계에 알릴 의무가 있습니다.”
피터 드러커는 《자본주의 이후의 사회》라는 자신의 저서에서 한국에 대해 이런 평을 하고 있다.
‘전쟁에 시달린 한국이 스스로를 주요 경제 강국으로 전환시킨 그 속도는 전례를 찾을 수 없는 승리입니다. 이것은 경영자의 헌신, 고된 일을 마다않은 노동자, 기업가 정신, 그리고 무엇보다 경영의 승리입니다.’ ---p. 349
<목 차>
간행사
산업화의 초석을 다진 건국 대통령 이승만
서문
대한민국의 힘은 어디서 나오는가?
자수성가한 사람들
빈농의 아들은 농사나 지어라?
‘캔 두 스피릿’이 가능했던 이유
대단한 나라 대한민국
20-50 클럽 가입
위대한 성취의 일등공신은?
산업 대통령 이승만의 진면목
제1장 기적은 없다 - 피와 땀과 눈물로 일군 근대화·산업화
고난의 시대에 영웅이 태어나다
교육에 배고픈 한국
화장실 고치는 기술자도 없는 나라
기적은 없다
한국 현대사의 블랙홀
각의에서 휴일 없애기로 결의
죽느냐 사느냐
공산주의를 이상향으로 착각
일본에 종속적인 산업구조 강제
식민지 시대의 공업화 경험 논란
식민지 통치는 인류의 야만적 범죄
제2장 남농북공(南農北工)의 현실 - 혼란, 5·14 단전(斷電)의 수모를 딛고
권력 공백으로 극심한 혼란 발생
식량과 연료 바닥 나
석탄을 달라
이승만, 에너지 전문가와 만나다
남농북공(南農北工)의 현실
중석은 구국의 자원
국가발전은 광업에서부터
5·14 단전(斷電)
전차 멈춰서고 합승마차 등장
태백산맥 뚫는 철도를 건설하라
철도망 마비 위기
태백산 종합개발계획 등장
영암선 철도 착공
한국판 먀샬 플랜 가동
경제안정 15원칙으로 광란의 물가 잡아
건국 국채 발행
제3장 캔 두 스피릿(Can do spirit)의 출현 - “만난을 배제하고 농지개혁 단행하라”
농토는 농민에게
북한 농지개혁은 전 인민의 소작화
한민당의 지연술책
“만난을 배제하고 농지개혁 단행하라”
지가증권의 운명
불과 11%만 산업자본화에 성공
농지개혁의 한계
‘캔 두 스피릿’의 출현
제4장 기업가들, 세상을 향해 나아가다 - “나라가 잘 되어야 사업도 잘 된다”
기업가의 힘
우리 옷감은 우리 손으로
국내 최초로 해외진출한 남만방적
백화점 왕 박흥식
국제무역에 도전
산업보국(産業報國)
경방 사장 김용완의 ‘기워 입은 빤쯔’
“나라가 잘 되어야 사업도 잘 된다”
정크무역 개시
마카오·홍콩 무역 열려
돌아오지 못한 비운의 무역선 앵도환 호
귀속재산의 향방
모리배 등장
귀속기업체 중 겨우 50여 개만 생존
북한만도 못했던 귀속기업 관리
보세가공무역의 선구자 전택보
‘동물원 살리기’ 앞장선 기업가들
혼란 수습 위한 몸부림
6·25 계기로 건설회사 난립
“무엇이든 할 수 있습니다”
미군 공사로 건설 기술 크게 발전
해외진출
중산층 확대에 결정적 기여
제5장 위기는 기회다 - 상업자본의 산업자본화에 앞장선 기업가들
한국은행의 금·은 비상대피
유엔군 대여금 받아내기 작전
한미 갈등 생기면 석유공급 중단
“기름 없이 달리는 자동차 개발하라”
반공포로 석방 단행
이승만 제거 위한 에버레디 작전
한미상호방위조약 이끌어내
한미동맹의 가치
전 국민의 2년 치 소득 날아가
글로벌 경제 회복에도 큰 역할
한일 무역회담으로 복구물자 도입
경사(傾斜)생산방식에 신선한 충격
네이산 보고서의 파장
“우리 돈으로 철강공장 지어라”
포항제철 신화의 시작
부산 중심으로 전시(戰時)무역 성행
선각자 이병철
제일모직 설립, 외제 양복지 몰아내
양말공장으로 일어선 정재호
개성상인의 후예
이북 출신의 월남 기업가 등장
남들 피난 준비할 때 시설투자 한 구인회
‘오사카 상인’의 제자 이양구
폐허가 된 삼척시멘트 일으켜 세워
현실안주한 기업가는 낙오
기업가 정신이 기업의 성패 좌우
제6장 4년 만에 전후복구 마무리 - “원조는 결코 공짜가 아니었다”
미국의 대한(對韓) 원조 개시
원조자금이 세입의 50~60% 차지
전시에도 학교 운영
대학생들 군 입대 면제시켜
기술원조
미 철도 고문단 맹활약
산업지도자 이승만의 혜안
백-우드 협약 조인
IMF와 IBRD 가입
“달러 시대를 대비하라”
대한(對韓) 원조에 대한 미국의 속셈
원조는 공짜가 아니었다
비료 문제로 농림부장관에게 할복자살 권고
이승만과 타일러 우드 격돌
“미국 사람들이 그렇게 옹졸하다니…”
운크라 자금으로 판유리·시멘트 공장 건설
충주비료공장 설립 합의
공사비 두 배로 늘어
수력발전 포기, 화주수종(火主水從)으로 전환
잉여농산물 도입 협정
산업전사들 등장
영암선 철도 전 구간 개통
이승만, 석탄증산 지시
원자력산업 시동 걸다
원자력원 설립은 획기적인 사건
이승만의 경제 철학
고집스럽게 저환율정책 고수
“원화 절하되면 국력 줄어든다”
저환율·저물가 정책의 부작용도 만만치 않아
1957년부터 미국 원조 줄어들어
제7장 내일을 향한 도약 준비 - 이승만의 경제개발계획, 박정희가 꽃피워
은행주 불하
외자 도입을 통한 공업화의 길
혼란이 진정되기 시작하다
경제 재건 위한 계획들
산업개발위원회 설치
각계각층에서 인재 선발
4·19로 물거품
박정희 시대에 꽃 피운 경제개발계획
한국경제협의회 출범
전경련으로 확대 개편
1950년대, 기적의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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