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건국의 기획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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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역사상 최초의 자유민주주의 국가’ 대한민국 건국에 얽힌 수많은 에피소드가 이승만 인맥을 중심으로 흥미진진하게 등장한다. 이 책을 쓴 김용삼 미래한국 편집장은 “이처럼 한국의 운명이 걸린 결정적인 사건의 배후나 전면에는 늘 이승만의 미국 내 인맥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분야에 대한연구가 진행되지 않은 채 방치되어 있는 것은 변명의 여지가 없는 우리 모두의 게으름 탓이 아닐까.”라고 묻는다.
<출판사 서평>
한반도 역사 최초로 이 땅에 자유민주주의 국가를 세운 이승만
건국대통령 이승만과 여정을 함께 한 사람들
그리고 대한민국 건국 전후의 비화(秘話)
이 책은 대한민국의 건국이 특정 인물 한 사람의 힘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국내와 해외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는 물론, 하와이 사탕수수밭에서 노동을 한 재미교포와 유학생들, 상해 임시정부에서 풍찬노숙하며 독립운동을 지도했던 지도자들, 외국인 선교사와 상인, 학자, 외교관, 기업인들이 힘을 합쳤기 때문에 가능했음을 밝히고자 시도한 작업이다. - 본문 중에서
2015년은 해방 70주년을 맞는 해다. 왜 우리는 일본에게 나라를 잃었고, 어떻게 되찾았는지, 그리고 대한민국이라는 근대적 국가를 건설한 의미를 되새겨보는 기회이기도 하다. 20세기를 통틀어 우리는 전반부 50년 동안은 망국과 식민지, 분단과 전쟁이라는 실패국가의 전형을 보였고, 그 후 50년은 세계사에서도 기념비적인 성장과 산업화, 민주화를 성취해내는 성공국가의 신화를 만들어냈다.
그 드라마틱한 성공의 신화를 탐구해 들어가면 1948년의 대한민국 건국과, 건국 지도자들의 모습이 나타난다. 특히 건국 대통령 이승만은 그 존재 자체가 곧 우리의 근현대사나 다름없다. 오늘 우리 사회는 대한민국의 건국을 끝까지 반대한 김구를 추앙하고 그를 영웅으로 받드는 반면, 정작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하듯 건국을 이루어낸 이승만에게는 독재자의 오명을 뒤집어 씌워 ‘역사의 감옥’에 가두다시피 하고 있다. 우리의 무지와 게으름 탓에 이승만에 대한 연구가 미진한 결과 이승만이 미 제국주의자들의 강요에 의해 친일파를 동원하여 분단정부를 먼저 수립했으므로 정통성이 없고, 주체사상으로 국가를 건설해 온 북한에 정통성을 부여해야 한다는 해괴한 주장들이 난무하고 있다.
<책 속으로>
한국의 운명이 걸린 결정적인 사건의 배후나 전면에는 늘 이승만의 미국 내 인맥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분야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지 않은 채 방치되어 있는 것은 변명의 여지가 없는 우리 모두의 게으름 탓이 아닐까.
2015년은 광복 70주년 되는 해다. 광복 70년을 맞아 해방과 건국을 기념하는 각종 행사나 학술회의, 저작, 언론보도들이 줄을 잇고 있다. 이 변화무쌍한 시대, 그 많고 많은 인물들 중에 왜 하필이면 이승만인가? 하고 묻는 분들에게 이렇게 답하고 싶다. 해방 공간에 이승만이란 존재가 있었기에 비록 분단된 형태로나마 대한민국이 건국되었고, 공산 침략으로부터 나라를 지켜냈으며, 오늘과 같은 번영의 터전을 닦았다고. --- p.6
그 무렵 이승만은 배재학당에서 서양 선교사와 선각자들을 통해 기독교와 영어, 그리고 미국이라는 새로운 문명과 만난다. 그가 배재학당을 만나기 전까지는 동양 고전을 공부한 선비로서 과거 시험을 통해 입신양명하는 것이 최고의 인생 목표였다. 말하자면 교조화된 주자학이 골수에 박힌 수구꼴통 청년 선비가 어느날 신학문을 접하고 민주주의, 인권, 자유, 공화제, 기독교, 영어 등을 접하면서 민주 투사의 길을 걷게 된 것이다. --- p.133
한반도에서 러시아를 몰아낸 일본은 1905년 11월 18일 을사보호조약(을사늑약)을 강제로 체결했다. 1905년 11월 18일 대한제국과 일본 간에 체결된 을사보호조약은 한국과 일본에 남아 있는 조약 원문의 어디에도 조약의 명칭(제목)이 없고, 고종의 어새나 국새가 날인되지 않았다. 조약 체결 당시 이토 히로부미는 무장 병력으로 궁궐을 포위하고 황제와 대신들을 협박하여 강제 체결했고, 조약의 체결 절차인 위임과 조인, 비준 과정을 거치지 않았기 때문에 국제협약 표준을 지키지 못했다. --- p.196
1913년 2월 3일 하와이에 도착한 이승만은 일제의 기독교 탄압을 폭로하는 저서『 한국교회 핍박』을 출간하여 일제는 기독교를 탄압하는 어둠의 세력이라는 점을 세계 여론에 호소했다. 또 하와이 미 감리교회가 운영하는 한인기숙학교 교장을 맡아 학교 이름을 한인중앙학원으로 바꾸었으며, 1913년 9월 20일에는 월간지『 태평양잡지』 창간(후에「 태평양주보」로 제호변경), 동지 박용만과의 불화, 1917년에는『 청일전기』 출간, 뉴욕에서 열린 25개 약소 민족대표회의에 한국대표로 참석하는 등 다채로운 활동을 전개했다. --- p.265
이동휘는 상해에 도착하자마 ‘이승만은 썩은 대가리’라고 비난하고 환영회 석상에서도 ‘자치운동이나 위임통치를 원하는 외교가는 원치 않는다’고 극렬하게 비난했다. 위임통치 논란으로 인해 상해 임시정부는 출범 초부터 격렬하게 요동쳤고, 결국 이승만이 1925년 대통령직에서 탄핵을 당하는 원인이 되었다. --- p.338
이런 상황을 지켜본 미국은 소련군 점령 지역에서는 미국의 영향력을 행사하기가 불가능하며, 소련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는 공산정권이 설립되는 것을 막을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1945년 8월 9일 일본에 선전포고를 한 소련군이 전광석화처럼 한반도로 밀고 들어갔다. 소련군의 점령 속도가 워낙 빨라 이대로 가다간 소련군이 한반도 전체를 점령할 수 있는 상황이 되었다. 미국은 한반도에서 폴란드와 같은 사태가 반복되어서는 안 된다는 우려 때문에 8월 14일 38선 설정을 소련 측에 제안하게 된다. --- p.454
<목 차>
1부 서양 선교사들과의 만남
2부 개화파 선각자들
3부 미국 유학, 황성기독청년회 시절
4부 하와이 시절
5부 상해 임시정부 시절
6부 미국에서 독립운동 시절
7부 해방 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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