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 현대사 위대한 3년 1952-1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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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대통령 이승만’을 말하지 않는가
1954년 7월 28일, 워싱턴의 미 의회 상하 양원 합동회의. 기립박수를 포함해 서른세 차례나 박수가 쏟아진 끝에, 연설을 마친 여든 살 노신사가 연단을 내려선다. 닷새 뒤 뉴욕 브로드웨이의 유명한 ‘영웅 거리(CANYON OF HEROES)’에서는 이 노신사를 위해 색종이 가루가 눈처럼 흩날리는 가운데 퍼레이드까지 벌였다.
극동 한귀퉁이, 플로리다주의 3분의 2쯤 되는 나라의 대통령이라고 했다. 연설이 있던 날은 그 나라에서 휴전협정이 맺어진 지 만 1년하고 하루 지난 날이었다. 반만년 가난 위에 전화(戰禍)까지 덮쳐 희망조차 없어 보이는 나라였다. 그런 나라를 위해 세계 최강대국 미국이 유엔을 움직여 전투병을 보내게 하고, 도무지 체급이 안 맞는 상호방위조약을 맺게 하고, 국빈으로 초청해 의회 연설도 모자라 영웅 퍼레이드까지 열어 주다니, 도대체 어떤 사람이길래? 미·소·중·일을 통틀어 이런 대접을 받은 남북 지도자는 전에도 없었고 이후로도 없었다. 이승만(1875~1965)이었다.
미국과 자유세계의 지도자들은 러시아나 중국 등 사회주의·전체주의 정권들 때문에 골머리를 앓을 때마다, 60여 년 전의 저날 이승만의 충고를 따르지 않은 걸 땅을 치고 후회하고 있을 것이다.
“미국 해군이 중국 해안을 봉쇄하면 중공의 교통망은 큰 혼란을 겪게 될 것입니다. 성공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공군도 필요할 것입니다.
소련이 지상군과 공군을 투입하지 않을까요? 아마 투입할 것입니다.
그러나 소련의 지상군과 공군 투입은 오히려 자유세계를 위해서 아주 좋은 일이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소련이 수소폭탄을 대량 생산하기 전에 그 제조 중심지들을 미 공군이 파괴하는 것을 정당화해 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절반은 공산주의, 절반은 민주주의 상태의 세계에서는 평화가 회복될 수 없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여러분의 중대한 결정이 지금 필요합니다.”
『이승만 현대사 위대한 3년 1952~1954』(인보길 지음, 기파랑, 2020)은 대한민국 건국과 초대 대통령 취임(1948) 이후인 ‘이승만 현대사’를 가리키며 묻는다.
“왜 대통령 이승만을 말하기 꺼려하는가?”
<출판사 서평>
대통령 직선제, 한미동맹, 자유시장경제
제목부터 1952~1954년 3년을 ‘위대한 3년’이라 했다. 저자에 의하면 ‘위대한 3년’은 그 앞에도 한 번 더 있었다. 1945~1948년의 만 3년, ‘건국혁명’ 3년이다. 책은 누가 뭐래도 이론(異論)의 여지 없는 첫 번째 위대한 3년보다, 과소평가되거나 심지어 폄하돼 온 나중 위대한 3년에 오롯이 집중한다.
1953년의 한미동맹은 그렇다 치고, 대통령 이승만의 1952년과 1954년은 각각 ‘부산 정치파동(1차 개헌)’과 ‘사사오입 개헌 파동(2차 개헌)’으로 알려진 해다. 책은 이름부터 ‘파동’ 대신 ‘대통령 직선제 개헌’과 ‘자유시장경제·국민투표 개헌’으로 고쳐 부른다. 유신헌법 15년 동안 그토록 되찾기 갈구했던 대통령 직선제다. 세계 10위권 경제대국을 가능케 한 자유시장경제다. 권력의 단맛에 빠진 386 출신들이 걸핏하면 내세우는 직접민주정치 제도다. 이 모두를 대통령 이승만이 처음 도입했다 ? 전율 같은 것이 느껴지지 않는가?
책은 1948년의 대한민국 건국을 ‘미완의 건국’으로 규정한다. 두 번째 위대한 3년을 거치고서야 대한민국은 ‘나라 국(國), 집 가(家), 국가집’으로 온전히 완성되었다고 본다.
“자유민주주의 주춧돌을 새로 놓았다. 대권의 선택권을 국민들 개개인의 손에 쥐여 줌으로써 나라와 집의 기초를 국민의 힘으로 다져 놓았다.
나라와 집의 경제 기둥을 새로 세웠다. 사회주의 통제경제로 얽어매어 놓은 헌법의 사슬을 끊어 버리고 나라경제와 국민의 집경제 무대를 전 세계로 활짝 열어, 선진 해양문명권의 무한한 글로벌 시장에서 마음껏 경쟁하여 승리할 수 있도록 전면 개방하였다.
나라집의 자유민주와 자유경제를 지켜 줄 철벽 담장을 쌓았다. 한국에 영토적 야심이 없는 기독교 자유 국가 중 최강의 미국을 붙잡아 목숨을 걸고 한미동맹을 체결하여 북한·중국·러시아의 북방 침략도 일본의 남방 침략도 없어졌다.” (351~352쪽)
나라를 찾고, 세우고, 지키다
3·1운동(1919) 70주년의 해에, 대한민국 건국이 1948이냐 1919년이냐 논쟁이 있었다. 1919년을 주장하는 세력이 애써 외면하는 것 하나는, 한성임시정부부터 상하이 통합정부까지 1919년 모든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첫 국가수반은 이승만이었다는 사실이다. 따지고 보면 이승만이 임정 대통령에서 탄핵 면직된 1925년 이후부터 건국 전까지를 제외하면 1919년부터 1960년까지 대한민국 대통령은 으레 이승만이었다(김구는 ‘주석’). 더 거슬러올라가면 1896년 독립협회 만민공동회에서 입헌군주제를 처음 주장하고, 미국 대통령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를 호기로 삼아 2·8독립선언과 3·1만세운동을 기획한 것도 이승만이었다. 이승만 국회의장 때 제정된 건국헌법은 전문(前文)에 3·1운동을 독립정신으로 천명했다. 이승만 건국대통령 취임사 날짜도 ‘대한민국 30년’(1919~1948)이다. 더 거슬러올라가면 1896년의 독립협회 만민공동회에서 입헌군주제를 부르짖은 것도 약관의 이승만이었다. 3·1운동 그해에 ‘대한공화국 대통령(President of the Republic of Korea)’라는 직함으로 일왕에게 보낸 국서는 짜릿하기까지 하다.
“(1919년) 4월 23일 한국 국민의회가 구성되어 대통령을 선출하고 정부를 수립하였으므로 일본 정부는 주권국가를 승인할 것이며 최소한의 외교관을 제외한 모든 일본인들을 즉각 철수시키라.” (46쪽)
이승만 현대사를 제대로 보려면 결국 ‘위대한 3년’뿐 아니라 그의 전 생애를 봐야 한다. 90년 생애 중 배재학당 시절부터 1960년 4·19로 하야하기까지 70여 년을 권두 화보와 서론 및 마무리, 그리고 중간중간 ‘자료’로 요령 있게 간추렸다.
4·19의 적극적 해석, ‘민주국민 완성’
다시 처음 질문으로. 그런데 우리는 왜 대통령 이승만을 말하기 꺼려하는가?
독재자라고 잘못 배웠기 때문이다. 부정선거로 쫓겨난 대통령이라고 잘못 알고 있기 때문이다.
책의 마지막 제15장을 4·19에 할애하면서, 저자는 4·19가 이승만이 한평생 그토록 꿈꾸던 ‘똑똑한 국민 만들기’의 완성, “이승만 최후의 성공작”이라는 과감한 해석을 내놓는다. 4월 23일 부상 학생들의 병원을 찾아 함께 얼싸안고 눈물을 흘린 일, 일주일 만인 4월 26일 자진 하야로 피해를 최소화한 일, 하야 후 대만 장제스(장개석) 총통의 위로 편지에 “나는 위로받을 이유가 한 가지도 없소. 불의를 보고 일어서는 똑똑한 젊은이들과 국민을 얻었으니 이제 죽어도 한이 없소”라고 답한 일. 즉, “4·19는 이승만 자신이 일으킨 것이나 마찬가지요, 자기 목표가 이뤄졌으니 후회가 없다는 말이다”(390쪽).
4·19 일주일 전부터 선거부정(3·15 정부통령선거)이 있었음을 늦게나마 알아차린 이승만이 자진 하야를 먼저 거론하기 시작했다는 국무회의 기록이 ‘쫓겨난 독재자 이승만’의 허상을 단번에 씻어 날려 준다.
“이승만이 대통령을 내놓고 다시 자리를 마련하는 이외는 도리가 없다고 보는데 혹시 선거가 잘못되었다고 들은 일이 없는가? 이 대통령을 싫다고 한다면 여하히 할 것인가를 생각할 필요가 있는데 나로서는 지금 긴급히 또 좋다고 생각하는 것은 내가 사면(사퇴)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잘 연구하여 보라.” (4월 12일 국무회의)
“이 사람들이 나더러 나가라고 하는 것 같아. 그대로 두면 한이 없으니 해결책을 강구해야겠다. 이 대책은 당신들(국무위원)하고 상의 못 하겠다.” (4월 19일 국무회의. 이상, 394~395쪽)
저자 자신 1960년 4월 19일에 경무대 앞까지 나간 4·19 세대다. 조선일보 편집국장이던 1995년 ‘이승만과 나라 세우기’ 특집과 전시회를 계기로 이승만을 다시 보게 되고 대한민국 건국사의 진실을 깨달았다고 술회한다(25쪽). 저자를 포함, 뒤늦게 이승만을 공부하고 비로소 알게 된 사람들에게는 공통된 회한 같은 것이 있지 않을까?
‘알고나 욕할걸.’
늦게라도 아는 것이 끝내 모르고 죽는 것보다 낫다. 건국이념보급회 회장, 이승만포럼 공동대표로 이승만 알리기에 나서고, 개인 유튜브 ‘인보길의 우남 이야기’(우남은 이승만 아호)를 운영하는 저자가 자신과 같은 사람들에게 권유한다.
“그는 독재자가 아니었습니다. 이 책을 읽고 말씀하십시오.”
<목 차>
건국 대통령 이승만(화보)
책을 열며 왜 ‘위대한 3년’인가
서론
3·1운동의 기획자 이승만
01 독립만세운동의 지령 ‘이승만 밀서’
김성수와 임영신의 증언 / 이승만 “기회 왔다, 궐기하라” / 양남兩南의 3·1운동과 한성임시정부 수립 / 필라델피아 독립선언과 시위 / 독립선언서 인쇄하고 낭독한 이종일
02 임정 대통령 이승만, 레닌과 대결
세계 최초로 공산주의 비판 / 레닌식 쿠데타로 이승만 탄핵 / ‘3·1정신’ 삭제한 소비에트식 개헌 / 대한민국 대통령 취임 3일 만에 ‘반란’
[자료 1] 최초의 반공 논문 「공산당의 당부당(當不當)」
제1부
직선제 개헌
부산 정치파동, 1952
03 건국 전야(前夜)
‘초대 총리는 누구?’ 조각당의 비밀? / 이승만 ‘거국 정부’냐, 김성수 ‘한민당 정부’냐 / 동아일보 첫 포문, 이승만에 개각 요구 / 한민당의 배신과 김구의 김일성 협상
04 건국과 전쟁
제헌 한 달도 못 돼 내각제 개헌론 / 농지개혁, 미군 철수, 개헌안 부결 / “미국이 내 말 안 들어서 전쟁 났소” / 맥아더 해임과 이승만의 대미 투쟁 / “내가 또 미치광이가 돼야겠군”
[자료 2] 청년 이승만, ‘국제 필화 사건’에서 감옥행까지
05 총성 없는 혁명
피난 국회, 세비 인상에 자녀 병역 기피까지 / 전쟁 중 지방자치 선거 / 미국과 야당의 음모 / “임기중 반드시 직선제 개헌을” / 계엄령 선포… 미국에 ‘선전포고’ / 77세 노인의 ‘전방위 전쟁’
06 국민이 뽑은 대통령
7·4 미 독립기념일의 반전 / 대한민국 첫 헌법 개정 / 최초의 직선 대통령 / 미국과 대등한 관계 설정하기
제2부
한미동맹, 1953
07 “통일이 아니면 죽음을”
이승만의 휴전 반대 투쟁 / ‘악마의 해방구’ 거제도포로수용소 / 한미조약 요구하며 ‘단독 북진’ 비상사태 선포 / 세계가 놀란 반공 포로 석방
08 경무대의 ‘1인 세계대전’
고독한 투쟁 / “아이크의 결재 문서로 가져오라” / “휴전 반대하지만 방해는 않겠다, 딱 90일 동안만” / 휴전협정 조인, 한국은 서명 거부 / 고래와 새우의 동맹
09 재건과 부흥
자립경제 기반 구축 / “새해 1월 1일까지 통일시켜라”
[자료 3] “공산당과는 협상 못 한다”
제3부
자유시장경제 개헌
사사오입 파동, 1954
10 경제 개헌안 제출
휴전 무효 선언, 미국과 또 싸우다 / 통제경제에서 자유시장경제로
11 또다시 나라를 잃을 뻔
제네바 ‘한반도+인도차이나’ 협상 / “중공군 즉시 철수, 북 자유선거 하라” / 한반도 통일 논의 결렬… “휴전 무효” 선언 / 베트남 패망… 대한민국, 이승만이 지켜 냈다
12 워싱턴의 한미 대결
고학생·망명객에서 국빈으로 / “한국은 원조를 구걸하지 않는다” / 마지막 깜짝 쇼 “독도 등대 불 켜라” / 받을 것 다 받고서야 한미동맹 비준서 교환
[자료 4] 이승만 대통령 미 의회 연설 전문
13 ‘위대한 3년’ 마지막 혁명
헌법에 ‘국민투표’와 ‘자유시장경제’ / “통제야 물러가라” / ‘종신 집권’ 허용한 까닭은 / ‘國+家=나라집’ 재건축 성공 / 이승만 터 닦고, 박정희 다지다
[자료 5] 청년 이승만, 또 하나의 꿈
마무리
자유의 십자가
14 이승만의 경제부흥
황무지에 건국 또 건국 / 장면, 유엔에 “경제복구 성공” 보고서 / 영성(靈性)의 카리스마
15 이승만의 원점, 그리고 4·19
자유의 발견: 성령·루터·웨슬리와의 만남 / “예수를 따라 목숨을 버리겠다” / 4·19는 이승만 최후의 성공작
[자료 6] 4·19 일주일 전 이승만이 자진 사퇴를 제시한 국무회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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