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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적화통일을 막아낸 이승만의 농지개혁

    내용

    이승만의 업적 중에서 경제사적으로 평가 받아야할 정책이 있다. 바로 농지개혁이다.

    그것도 혁명적인 방법이 아닌 지주출신 정치세력의 반발을 다독거리며 국회를 통한 민주적 절차의 소산물이었다.

    그 때까지만 해도 한국은 ‘양반과 상놈의 의식’과 더불어 ‘지주와 소작인 제도’가 있었다. 당시 국민의 71%가 농민이었는데 자기 땅을 가지고 있는 자작농은 14%에 불과했다. 나머지 57%는 지주의 땅을 빌려 경작하는 소작농이었다. 소작농조차 할 수 없는 머슴들도 많았다. 국민의 반 이상이 농노나 다름없는 묶인 몸의 신세였다.


    이승만은 전근대적인 양반과 상놈의 구분, 지주와 소작인으로 질기게 이어져 온 지배구조를 무너뜨리는 것이 급선무라고 생각했다. 그것이 공산주의를 이기는 길이라 생각했다. 그는 농토를 농민들에게 돌려줘야 한다는 구상을 실천에 옮겼다. 이것이 6·25 직전에 단행한 농지개혁이다.

    이승만의 농지개혁을 칭송한 사람은 놀랍게도 노무현 전 대통령이다. “남미 여러 나라를 순방하면서 왜 한국이 성공했을까 하는 생각을 많이 했다. 옛날 지도자들이 실책을 더러 했었지만 그래도 한 가지씩은 다 했다. 자유당 시대를 독재시대, 식민지 시대에서 해방은 됐지만 암흑시대로 생각했었다. 그런데 그때 토지개혁을 했는데, 지나고 보니 정말 획기적인 정책이고 역사를 바꾼 사건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그것을 해서 한국전쟁이 터졌는데도 국가독립, 안정을 지켜냈고, 국민이 하나로 뭉쳐서 체제를 지켜냈다.”(출처; 대통령의 경제학, 이장규, 기파랑)

    2003년 한국기자가 룰라 브라질 대통령에게 "브라질처럼 풍부한 자원을 가진 나라에 어째서 5000만 명이 넘는 절대빈곤층이 존재하는 겁니까?"라고 묻자, 룰라 대통령은 이렇게 대답했다. "한국은 과거 50년대에 농지개혁을 했지만 브라질은 그러지 못했고, 아직도 그것이 풀어야 할 숙제입니다. 브라질의 경제는 사회개혁 없이 심각한 불균형성장을 해왔던 것이 문제지요."

    만약 농지개혁이 미루어져 6·25 때 남한을 점령한 북한군이 지주의 농토를 빼앗아 소작농에게 나눠주었다면 이들은 농토를 빼앗기지 않으려고 북한군 편에 서서 싸웠을 것이다. 중국의 모택동이 장개석한테 이긴 이유이다. 6.25 이전에 단행한 이승만의 농지개혁은 민주주의의 토대를 놓았을 뿐 아니라 민주한국을 지켜냈다.

    정부는 농지를 수용하면서 지주들에게는 지가증권을 발급했다. 지주에게 보상한 20억 원의 대략 절반가량이 지주의 손을 떠나 산업자본으로 전환되었다. 이로써 지가증권이 산업자본으로 전환되어 농업사회를 산업사회로 전환시킨 한국자본주의의 시발점이 되었다. 20세기 식민지체제를 경험한 신생국가가 농지개혁을 거쳐 산업화와 민주화를 동시에 성공한 경우는 세계사적으로도 대한민국이 유일하지 않을까 싶다.

    농업경제학자인 김성호 전 한국농촌경제연구원 고문은 "이승만의 농지 개혁이 한국의 번영을, 북한의 소련식 토지국유화가 오늘의 북한 참상을 불렀다"고 단언했다.





    [출처] 적화통일을 막아낸 이승만의 농지개혁 - 홍익희 교수

  2. 당시 시대상황과 농지개혁의 효과 1

    내용

    1년 내내 기생집에서 놀아도 재산이 늘어 가는 대지주들



    1. 똥구멍이 찢어지도록 가난하고 불쌍한 소작농들

    소작농(小作農) 제도는 일제강점기 때 일제가 친일 지주 보호와 한국 쌀의 일본반출을 위한 목적으로 육성되었으며 해방 당시 전인구의 70% 이상이 농민인데 농민의 80% 이상이 소작농이었다. 소작농들은 지주(地主)들에게 소작료로 산출량의 50%를 지불해야만 했다. 악덕 지주들은 산출량의 70% 이상을 소작료로 징수하기도 했다. 당시 소작농들이 소작료를 내고 손에 쥐는 평균 소득은 쌀 2.2석(4가마)이었다. 이 쌀 4가마로 6-7 명의 가족이 일 년을 살아야 했으니 그 생활은 비참하기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소작농들은 땅 1평, 집 한 간도 없어 지주들이 내 쫓으면 그야말로 가족 전체가 길바닥에 나가 앉아 당장 굶을 수밖에 없어 지주들에게 그저 엎드려 빌며 노예와 같이 살 수밖에 없었다. 아래는 소작농가의 실제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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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작농의 집


    소작농들에게는 인권이라 것은 없었고 매일 흰 쌀밥을 먹는 지주 집의 개(犬)가 부러울 정도였다. 소작농들은 봄이 되면 식량이 바닥이 나 산에 가서 칡뿌리와 나무껍질을 벗겨 먹고 고단한 삶을 죽지 못해 이어가야만 했다. 가난에 찌든 소작농들은 제대로 먹은 것이 없어 대장이 말라붙고 대변이 밤알처럼 굳어져 항문으로 나오질 못해 대변 볼 때마다 항문이 찢어져 피가 났다. 이 가난을 “똥구멍이 찢어지도록 가난하다.”라고 표현했다. 배운 것이 없는 이들은 죽도록 농사를 짓고 뼈가 부서지도록 고생을 하여도 자기 땅 1평도 못 가져 보고 지주들에게 수탈과 멸시를 당하다가 한 많은 이 세상을 떠났다. 이런 소작농들이 전 인구의 60% 정도였으니 소작농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국가의 미래는 암담할 뿐이었다.



    2. 일 년 내내 기생집에서 놀아도 계속 재산이 늘어 가는 대지주들

    비참한 소작농의 생활에 비해 대지주들은 일제에 동조만 하면 천국에서 사는 것과 같았다. 1천석(약 2천 가마)의 대지주라 하면 소작인들로부터 1년에 쌀 1천 가마를 회수할 수 있는 농지를 소유했다는 뜻이다. 아주 큰 대지주는 만석꾼이라 했는데 1년에 쌀 1만 가마가 수입되는 대부자였다. 당시 공업 생산이란 거의 없어 농업이 국가의 가장 중요한 산업이었다. 1년 국가총생산액의 대부분인 쌀 총생산량이 1500 만석(약 3000만 가마) 정도였던 일제 강점기에 한 명의 지주가 매년 1만 가마의 쌀을 순수입으로 가진다는 것은 어마어마한 재산 가치였다. 이들 지주들이 소작료로 받은 쌀이 거의 모두 일본에 반출되었는데 약 250만 평 이상의 논을 소유해야 만석꾼이 될 수 있었다. 아래는 만석꾼 집의 실제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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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석꾼의 집


    1천석 이상의 대지주들은 적어도 25만 평 이상의 논을 소유했고 소작농이 100가구가 넘었다. 대지주는 자기 집 주위에 작은 초가집들을 백여 채 이상 지어 놓고 소작농들을 그곳에 살게 하면서 경작하게 하였다. 즉 대지주 집을 중심으로 해 하나의 마을을 형성했고 지주들은 그 안에서 제왕으로 군림했다. 대지주들은 마름이라는 관리인을 두고 소작농을 비롯한 모든 관리를 맡겼는데 이 마름들이 때로는 지주들보다 더 소작농들을 괴롭히며 갑질을 했다. 대지주들은 소작농들에게 하늘과 같은 존재로 소작농들을 노예처럼 부리고 살았으며 일 년 내내 기생집에 가서 흥겹게 논다고 해도 재산은 계속 불어났다. 그러니 유상이든 무상이든 지주들이 농지를 몰수당한다는 것은 대낮에 날벼락을 맞는 것보다 더했다.




    [출처] 프리미엄 조선 - 장대성의 세종 회장과 충무공 사장 

  3. 당시 시대상황과 농지개혁의 효과 2

    내용

    3. 소작농들에게 자유 주기 위해 지지 세력인 한민당과 대적해 

    1948년 8월에 수립된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30세에 도미하여 명문대에서 학사, 석사,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오랫동안 미국에 체류하며 독립운동을 하였다. 이승만은 1904년 도미 전 한성감옥소에 있을 때 저술한 ‘독립정신’이라는 책에서 국민의 자유와 권리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하는 등 젊은 시절부터 농민들과 노동자들에 대하여 상당히 진보적인 시각을 갖고 있었다. 초대 대통령으로 당선된 그는 한국의 미래를 위해서는 소작농들을 지주들의 속박으로부터 풀어주어 자경 농민으로 만들고 국가 주력산업을 농업에서 공업으로 전환하는 기반을 구축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토지의 무상몰수와 무상분배를 주장하는 공산주의자들에게 소작농들이 현혹되는 것도 막아야 했다. 소작농들을 공산주의자들에게 넘어가지 않게 한 농지개혁은 한국전쟁 때 북한의 인민해방 전략을 무산시켜 한국의 공산화를 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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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승만 대통령 충북 농촌 방문 환영 인파



    이승만은 유상몰수와 유상분배의 자본주의 농지개혁을 구상했다. 그러나 농지개혁을 위해서 자기를 지지해준 지주세력의 한민당과 싸움을 해야만 했다. 이승만은 여러 차례에 걸쳐 이들과 어렵게 협상을 거듭하여 1950년 3월에 농지개혁 법안을 공포하고 소작농들에게 농지분배예정 통지서를 발부했고 4월에 농민들은 자기 소유가 될 농지에서 파종하는 기쁨을 맛보았다. 그러나 지주 중 일부는 이미 소작농들에게 농지를 강제로 매도해 돈을 챙겼고 극소수는 사립대학교 설립에 농지를 출연해 대학교 교주(校主)가 되어 농지개혁을 피했다. 농지개혁 후 1951년 순수 자작농의 비율이 아래 표와 같이 80% 이상으로 증가했으니 성공한 개혁이었다. 농민들은 자기 농지에서 도전정신을 갖고 창의적으로 농사지을 수 있게 되었고 농촌사회도 민주화가 되어 갔다. 농지 소유상한을 2정보로 하는 최종 농지개혁 법안은 다음과 같다.


    1) 몰수된 지주에 대한 보상은 연평균 생산량의 150%로 한다.

    2) 지가증권 상환은 5년간 분할로 한다.

    3) 농지를 부여받은 농민은 연평균 생산량의 150%를 5년간 분할 상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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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프리미엄 조선 - 장대성의 세종 회장과 충무공 사장 

  4. 당시 시대상황과 농지개혁의 효과 3

    내용

    4. 농지개혁으로 두산그룹, 선경그룹, 한화그룹 등이 탄생되어

    지주들은 유상몰수 된 농지의 값으로 지가증권을 1950년 6월 한국전쟁 발발 직전에 수령해 부산으로 피난을 가 그것을 팔아 생활을 해야만 했다. 해방 후부터 올라가던 물가는 전쟁으로 폭등했다. 1945년에 100의 물가가 ‘50년에 3,000, ‘53년에는 50,000 정도까지 날아간 반면 지가증권 값은 지주들의 생활비 조달로 인한 투매로 폭락해 지가증권 실질가치는 몇 푼 되지 않았다. 지주들의 막대한 토지 재산이 녹아버린 탓으로 산업자본으로 전환되지 못해 한국의 산업화는 요원했다. 이승만 정부는 지가증권이 가치 없이 증발되는 것을 막기 위해 타인으로부터 매수한 지가증권으로 해방 후 일본인들이 놓고 간 귀속재산의 매입을 허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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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가증권, 발행일이 1950년 5월 31일이다


    한국전쟁 시 액면가의 20-30% 정도로 저렴하게 매입한 지가증권을 귀속재산 불하받을 때 본래의 액면가로 사용할 수 있었다. 대금 납부도 분할상환이어서 인플레이션이 극심한 그 당시에는 대단한 특혜였다. 전쟁 중이어서 앞날을 전혀 예측할 수 없는 불안과 위험이 있음에도 도전 정신이 있는 젊은 사업가들이 이 기회를 이용하여 귀속기업을 매입했다. 이때 박두병씨가 두산그룹의 모태인 소화 기린 맥주(현 OB 맥주)를 최종건씨는 SK그룹의 모태인 선경직물을 김종희씨도 한화그룹의 모태인 조선화약공판(후에 한국화약)을 저렴하게 매입한 지가증권을 사용하여 불하대금의 상당액을 충당해 매수했다. 위기는 새로운 기회라 한다. 농지개혁이란 급변화와 한국전쟁의 위기가 도전정신의 젊은 사업가들을 위대한 기업가로 만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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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OB 맥주 공장의 전신인 소화기린 맥주공장




    5. 이승만은 조선 선비정신과 미국 청교도 자본주의 융합한 국가 창조 원해

    이승만은 조선말 과거 합격을 위해 유학과 성리학을 상당 수준으로 공부해 그의 한시(漢詩) 창작 능력과 서예 솜씨는 일품이었다. 또한 미국 명문 하버드대와 프린스턴대에서 석사와 박사학위를 취득해 동서양 학문에 통달한 그는 세계 최고의 지성인이라 미국 정치인들과 고위관리들도 그를 어려워했다. 그는 미국정부로부터 임시정부의 승인을 받으려고 혼신의 노력을 다 했으나 공산주의자들의 방해로 실패하여 공산당들을 조국의 독립을 방해하는 최고 악질로 생각했다. 그런 그가 공산주의자였던 조봉암을 농림부 장관으로 임명해 농지개혁을 시켰을 만큼 그는 현실을 직시하는 실용주의 정치가였다. 아래 도표와 같이 그의 성공적인 농지개혁은 박정희 정부 경제개발의 초석이 되어 한국경제의 기적을 달성하게 했다. 반면 한국보다 자원이 훨씬 많아 부유했던 필리핀과 중남미 여러 국가들은 농지개혁을 못해 경제개발에 실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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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교도 자본주의와 민주주의가 미국을 세계 최강의 국가로 만든 것을 잘 알고 있는 이승만은 초대 대통령 취임사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강조할 정도의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지만 경무대(현 청와대) 뒤뜰에서 매일 도끼로 장작을 패는 전형적인 한국인이었다. 그의 꿈은 한국을 선비정신과 기독교 정신이 융합된 민주주의 국가로 만드는 것이었다. 그는 1960년 4.19 혁명 때 국민이 원하는 대로 대통령직을 사임한다고 발표하고 무일푼으로 하와이로 갔다. 하와이에서 그는 사랑하는 조국 한국 가기를 병석에서 매일 학수고대하다가 1965년 7월 91세로 운명하였다. 그는 한국행 비행기 표와 여비를 마련하기 위해 병석 중에도 이발비 5달러를 아끼려고 부인이 머리를 깎게 해 돈을 모았다. 정부와 언론도 그의 귀국을 막아 시체가 되어 고국에 돌아왔지만 그는 많은 사람으로부터 건국의 아버지라고 칭송을 받고 있다.




    [출처] 프리미엄 조선 - 장대성의 세종 회장과 충무공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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