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李承晩)박사는 해외 독립운동 기간 중 항상 각국 원수, 특히 미국 대통령과 직접 담판하는 스타일의「정상급」외교를 펼쳤다.
윌슨(W Wilson). 프랭클린 루스벨트(F D Roosevelt). 트루먼(H Truman)대통령 등이 그의 교섭 상대였다. 이승만의 이러한 고차원 외교는 그가 1905년 약관 30세로 하와이 한인교포의 대표로서 미국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Theodore Roosevelt)와 회견했을 때부터 시작된다.
이승만은 한성감옥에서 풀려난지 3개월만인 1904년11월4일 미국으로 가게 되었다. 이 무렵 대한제국(大韓帝國)은 러일전쟁에 휘말려 그 운명이 풍전등화(風前燈火)와 같았다. 일본의 침략적 본성이 노골화되는 시점에서 고종(高宗)황제의 개혁파 총신 민영환(閔泳煥)과 한규설(韓圭卨)이「영어 잘하는」이승만을 미국에 밀파(密派)하여 앞으로 열릴 러일전쟁 강화회의에서 미국이- 1882년 체결된 조미(朝美)조약에 따라-한국의 독립을 보살펴줄 것을 요청하기 위해서였다. 고종황제가 그를 궁중으로 불러 친히 밀명을 하달하려 했으나 이승만은 황제의 알현을 거절했다.
나이 서른에 루스벨트와 직접 담판
난생 처음으로 태평양을 횡단한 이승만은 1904년11월29일 하와이의 호놀룰루에 도착하였다. 그곳에서 하와이 감리교 선교부의 와드맨(J W Wadman) 감리사와 윤병구(尹炳求)목사, 그리고 교포들의 따뜻한 영접을 받았다. 그는 윤목사와 밤새도록 나라일을 의논한 끝에 장차 미국에서 강화회의가 열릴 경우「해외에 있는 한국인들」의 의사를 이 회의에 전달하기로 합의하고 다음날 떠났다.
이승만은 美대륙으로 항행, 샌프란시스코. 로스앤젤레스와 시카고를 경유해 1904년 제야의 밤(12.31)에 목적지 워싱턴 DC에 도착했다. 여장을 푼 이승만은 우선 주미공사관을 찾아가 김윤정(金潤晶)등을 만나 자신의 사행(使行)에 대한 협조를부탁했다. 그후 그는 민영환. 한규설이 지시한 대로 친한파(親韓派) 상원의원 딘스모어(H A Dinsmore)를 접촉, 그를 통해 미국 국무장관 헤이(J Hay)와의 면담을 서둘렀다. 그 결과 이승만은 1905년2월20일 딘스모어 의원과 함께 헤이 장관을 30분간 면담할 수 있었다. 헤이는 이 자리에서 朝美조약 상의 한국에 대한 의무를 지키도록 최선을 다하겠노라고 말했다. 이것은閔.韓의 밀사(密使)로서 이승만이 거둔 최초의 외교적 성과였다. 그러나 불행히도 헤이장관이 그해 7월1일 사망함으로써 그 효과는 유실되었다.
이승만과 루스벨트 대통령의 역사적 만남은 그후 5개월여가 지난 1905년8월4일 오후3시30분에 이루어졌다. 이에 앞서 루스벨트는 7월초에 러일강화회의가 미국의 뉴햄프셔州 포츠머스군항(軍港)에서 자신의 중재하에 열린다고 공표했다. 이어서 그는 심복인 육군장관 태프트(W H Taft)를 동양으로 파견, 일본과의 사전협의를 벌이도록 했다.
동양출장에 나선 태프트 일행은 7월12일 호놀룰루에 기착했는데, 도착에 앞서 하와이 교포들은「특별회의」를 소집, 윤병구와 이승만을 강화회의에 파견할 대표로 선정하고 미국대통령에게 제출할 탄원서를 마련하였다. 윤병구는 와드맨 감리사를 통해 자기와 이승만을 루스벨트에게 소개하는 편지를 태프트로부터 얻어냈다. 하와이 교포들의 특별회의에서 채택된 탄원서에서 윤.이 자신들은 고종황제의 대표가 아니라「8천명」하와이 교포들의 대표로서「1천2백만」한국 백성(Common People)의 민정(民情)을 대변한다고 전제하고, 한국에서 심화되는 일본의 침략행위를 규탄하면서 미국 대통령이 포츠머스 회담을 계기로 朝美조약에 따라한국의 독립을 지켜주기 바란다고 호소하고 있다.
윤목사는 이 탄원서를 가지고 7월31일 워싱턴에 도착했다. 그를 맞은 이승만은 함께 서재필을 찾아가 이 탄원서의 영문표현을 다듬었다. 그리고 윤.이는 하와이에서 얻은 태프트 장관의 소개장을 가지고 루스벨트 대통령을 만나기 위해 뉴욕 오이스터 베이(Oyster Bay)의 여름 백악관을 찾아갔다. 때마침 루스벨트는 강화회의장으로 향하는 도중 대통령을 예방한 러시아 대표단을 맞아 눈코뜰 사이 없이 바쁜 가운데서도 한국대표들을 응접해 주었다. 이 역사적 회견에서 이승만은 루스벨트에게 탄원서를 제출하고『언제든지 기회있는 대로 朝美약조를 돌아보아 불쌍한 나라의 위태함을 건져주기 바라노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루스벨트는 사안이 워낙 중대하므로 공관을 통해 탄원서를 보내주면 그것을 강화회의에 제출하겠노라고 대답했다. 이에윤.이는 그렇게 하겠다고 다짐하고 물러나왔다.
루스벨트가 보여준 태도는 윤.이가 기대했던 것 이상으로 고무적이었다. 윤.이는 그날 밤으로 기차를 타고 워싱턴의 한국공사관을 찾아가 김윤정 대리공사를 붙들고 필요한 조치를 당장 취하자고 졸랐다. 그러나 뜻밖에도 김윤정은 본국정부의 훈령이 없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없노라고 딱 잡아뗐다. 이승만은「별말을 다하고 길길이 뛰고 달래며 을러」봤으나 허사였다. 결국 하와이 교포들의「탄원서」는 미국 정부당국에 제출되지 못한채 사문서( 死文書)가 되고 말았다. 포츠머스 강화회의에서 한국인의 목소리가 대변되지 못한 것은 물론이다.
***한심한 관료주의 이승만의 최초 사행은 이렇게 무참히 좌절되었다. 그는 8월9일 민영환에게 보낸 한글 편지에서 자기의 사행이 실패한 원인을「월급이나 벼슬에만」매달린 김윤정의 협조거부, 즉 배신에서 찾았다. 물론 국가 존망지추(存亡之秋)에 김윤정이 보여준 관료주의적 태도는 규탄받아 마땅하다. 그리고 김윤정의 그러한 행동은 그 당시 일본측에 매수되었기 때문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과연 이승만 사행의 실패 원인이 김윤정의 배신에만 있었는가. 호놀룰루에서 윤.이에게 루스벨트 앞 소개장을 써주었던 태프트 장관은 7월27일 도쿄에서 일본총리 가쓰라(桂太郎)를 만나 한국 및 필리핀 문제를 논의한 끝에 악명높은「태프트-가쓰라 밀약」을 맺었다. 루스벨트는 이 밀약을 7월31일에 추인하였다. 그런데 이 밀약을 통해 미국은 일본이 장차 필리핀을 공격하지 않는다는 조건하에 일본으로 하여금 한국에 종주권을 수립하는 것을 허용하였던 것이다. 달리 말하자면, 루스벨트는 윤.이를 만나기 전에 이미 일본이 원하는 한국의 보호국화를 승인해주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가 윤.이를 응접했을때 한 말은 성가신 한국손님을 정중히 돌려보내기 위한 구차스런 둔사(遁辭)에 불과했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이승만의 처녀외교는 제국주의 국가간의 흥정에 희생, 좌절되고 말았다.「태프트-가쓰라 밀약」은 1 924년에야 비로소 미국의 외교사가(史家) 데네트(T Dennett)에 의해 세상에 폭로되었다.
<柳永益>
[출처: 중앙일보] <이승만과 대한민국 탄생> 4. 이승만의 처녀外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