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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1편 - 독립운동은 ‘돈, 돈, 돈!’ 전쟁이다

    내용
    김학은 교수 /연세대 명예교수


    식민지시대를 겪은 민족은 건국이 얼마나 힘든 과정인가를 뼈에 사무치게 느끼고 있다. 대한민국을 건국한 초대대통령 이승만의 외교독립론은 그래서 강한 설득력을 갖는다. 또한 외세에 지배를 당했던 다른 나라의 건국대통령들은 어떤 아픔과 인내와 고뇌로 나라를 세웠을까, 그들을 통해 대한민국의 건국이 갖는 의미를 되새겨보는 기회를 이 칼럼이 제공하게 될 것이다. <편집자 주> 

    나라를 빼앗겨 총을 드는 것은 참으로 백성 된 자로서 마땅히 앞장서야 할 일이다. 그러나 그 실천은 어렵다. 무장독립운동에는 첫째 돈, 둘째 돈, 셋째도 돈이 든다. 그 돈을 어떻게 조달할 것인가. 1900년 조선에서 하루 품삯이 30센트였다.

    당시 출산율과 유아사망률 등을 고려해 가구당 가족수가 6인이라면, 하루 가장이 버는 돈을 가족수로 나눌 경우 1인당 하루 5센트밖에 안 된다.그러니 당시 선교사들은 조선에는 부자다운 부자가 없어서 학교와 병원을 지을 돈을 모을 수 없다고 미국 선교본부에 보고하기까지 했다. 여기에 1902~1905년 미주에 건너간 이주민은 5000명 정도였다. 이들도 낮은 임금과 중노동에 시달렸다. 일제가 강점한 1905년 이후에는 아예 이민 창구도 닫아버렸다.미국 교포가 적어 채권판매의 효과도 그리 크지 않다. 무엇보다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목표로 하는 채권판매는 원칙적으로 불법이었다. 이것이 미국의 ‘청천법’(blue sky law)이다. (이승만이 이 법을 어떻게 합법적으로 우회했는지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설명하겠다.)

    돈을 조달한다 하여도 어디에서 군사훈련을 할 것인가. 박용만은 네브라스카에서 한국소년들을 모아 소년병학교를 세웠다. 이것은 미국 연방법에 위배된다. 1818년 4월 20일 미국의회를 통과한 법률이 있다. 이것을 보통 ‘1818중립법’이라고 부르는데 ‘항구적 입법’으로 일제시대에도 유효했다.그 내용의 일부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미국과 평화관계에 있는 외국 군주의 영토나 지배자를 목표로 그곳에서 수행하려는 어떠한 군사적 원정이나 계획을 시작하거나 착수하거나 그 수단을 제공하거나 준비하는 자는 유죄이다. (2) 미국 관할 내에서 외국 군주, 식민지, 지역, 또는 국민에 봉사하기 위한 임관을 수락하거나 이의 사령을 한 모든 미국 시민은 중한 범죄를 범한 것으로 간주한다. (3) 모병하거나, 스스로 입대하거나, 입대할 의도로 관할권을 벗어나는 타인을 고용하거나 구하려는 자는 유죄이다.다시 말하면 당시 미국과 평화관계에 있는 일본 국왕을 목표로 군사적 행동은 안 된다는 것이다. 미국에서 조선 국민에 봉사하기 위한 임관도 안 된다. 그러한 목적으로 모병도 안 된다.1818중립법은 계속된다. (4) 어떤 선박의 장비를 갖춰 무장시키는 자, 이를 시도하는 자, 또는 설비하거나, 개조하거나 무장하는 데 고의적으로 관여하는 자는 유죄이다.(5) 이러한 군함, 순양함, 기타 무장 선박의 화력을 증대, 증강시키는 자, 증대되거나 증강하도록 조달하는 자, 또는 증대시키거나 증강시키는 데 고의로 관여한 자는 유죄이다. (6) 세관원은 명백히 군사목적으로 건조됐거나 장비를 갖춘 모든 선박은 압류한다.

    덧붙여 설명하자면 설혹 몰래 군사훈련을 실시했다 해도 조선까지 그들을 싣고 갈 해상수송수단을 확보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를 강제로 비밀리에 하는 자는 유죄이다. 설사 운 좋게 병사와 무기를 실었다 해도 그 선박을 방문하고 수색할 권한을 행사하게 된다. 무기와 병사는 전쟁금지목록에 속한다.이 법에 추가해 타일러 대통령은 1941년 캐나다 접경인 미국 북부에 비밀집회, 동아리, 모임, 협회를 금하는 법령을 공포했다. 1850년과 60년대에 대통령은 서인도, 중미, 캐나다의 반란에 무기를 돕는 행위를 금하는 법률도 선포했다.미국이 이 법에서 의도하는 것은 국민의 단결이다. 미국은 여러 민족의 집합체이다. 만일 민족마다 그 형편과 사정에 호소해서 군대를 만들도록 허용하면 미국 군대의 단합이 깨진다는 점을 우려한 것이다.당시 미국에는 나라가 없는 한국민족뿐만 아니라 아일랜드민족, 체코민족, 슬로바키아민족, 아르메니아민족, 폴란드민족, 헝가리민족 등이 있었다.이 1818중립법의 중요성은 이것이 1819년 영국의 외국모병법과 그 후 여러 유럽국가의 형법에서 채택됐던 유사한 법률의 기초가 됐다는 데 있다. 따라서 미국과 유럽 국가들이 전쟁금지제품과 모병을 제한하면 식민지는 무기와 병사를 조달할 방법이 없다.

    ‘가재는 게 편’인 세상의 외로운 싸움
    무장투쟁의 남은 방법은 한 가지. 모병금지법을 채택하지 않은 국가를 이용하는 방법이다. 예를 들면 중국과 소련뿐이다. 그러나 소련은 1차 세계대전 와중에 소련에 주둔하던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의 무장해제를 명했다.만주사변으로 국제연맹에서 조사단을 파견했다. 이때 드러난 사실은 중국이 만주에 있는 조선인에게 우호적이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우선 토지를 소유할 수 없었다.토지가 없으면 군사훈련은 불가능하다. 이 보고서에서 드러난 또 하나의 사실은 소련도 시베리아에 거주하는 한국인들에게 우호적이지 않았다. 소련이 일본과 우호적일 때는 한국인이 보호받았지만 적대적일 때는 학살당했다.추가해 당시 대부분의 유럽 국가는 식민지를 거느리고 있었다. 일본과 유럽 국가들은 동병상린 관계였다. 가재는 게 편인 세상이었다.
    이승만은 이 모든 사실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 증거가 그의 박사학위논문인 바, 위에서 인용한 문장의 출처가 그의 논문이다.앞서 독립전쟁에는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돈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래서 이승만은 호소한다. “얼마 안 되는 무력을 써버려 장래에 원기를 다 탕비해 놓고 앉아 만 리 같이 창창한 독립운동의 길을 어찌 하고자 하느뇨.” 그에게 남은 길은 한 가지. 영토적 야심이 없는 미국의 양심에 호소하는 외교독립방략뿐이었다.  


  2. 2편 - 이승만이 미국을 믿게 된 이유

    내용
    청년 이승만은 러시아와 일본을 믿지 않았다. 미국도 믿지 않았다. 그는 미국 선교사의 입국이 상인을 불러오고 이들을 보호한다는 구실로 군대가 파견된다고 생각했다.그럴 의심을 할 만한 것도 알렌 선교사가 한국에 입국한 이래 언더우드, 아펜젤러, 에이비슨 등이 뒤를 이었다.
    미국 공사관에도 해병대가 파견됐다. 인천과 서울에는 미국 상사가 입점했다. 때마침 하와이가 비슷한 과정을 거쳐 마침내 병탄됐다. 그는 말한다.“미국 선교사들이 한국에 도착하기 시작한 직후 우리 한국인들은 어떻게 선교사들이 하와이 군도에 가서 원주민들을 다수 기독교로 개종시켰는지를 알았다. 그리고 선교사들 뒤에 미국 기업가들이 따라와서 원주민과 장사를 하면서 원주민들에게는 별로 이익을 끼치지 않고 자기들만 치부하고 있었다는 것도 알았다.그리고 우리는 미국 선교사들이 한국에 오기 조금 전에 미국 정부가 이 섬들을 모두 병합해 그 영토의 일부로 만들었으며 이 과정에서 하와이의 여왕이 폐위됐음을 알았다. 따라서 우리 한국인은 당연히 우리나라에 대해서도 똑같은 운명이 계획된 것으로 생각했다. 미국인들이 일본과 중국 그리고 한국으로 하여금 문호를 개방하고 통상을 하도록 강요한 다음 선교사들이 왔기 때문에 우리로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선교와 통상의 원리를 깨닫다
    그러나 이승만은 곧 선교와 통상에서 평화적 공생의 원리를 발견하게 된다.“(조선이) 아직까지 부지하여 온 것은 다 외국들이 교제상 서로 관계한 형편에 달려 된 것이라. 만일 지금껏 통상이 아니 되었다면 어떤 강한 나라가 무슨 욕심을 부렸을는지 알 수 없을지니 오늘날 이 뜻을 깨쳐본 즉 전일에 까닭 없이 남을 의심하던 것이 어찌 어리석지 않으리오.”이승만이 미국에게 영토적 야심이 없음을 발견한 것이다. 대신 미국이 조선을 시장으로 본 것이라는 깨달음이다. 이 생각의 대변화는 어디에서 연유한 것일까. 그가 감옥에서 쓴 글에 잘 표현돼 있다.
    “옛적에는 각국의 다툼이 항상 병역으로 위주 하여 경의를 물러내고… 이기는 자는 토지를 차지하여 인민을 노예로 만드는 것이 성공하여 나라와 나라가 서로 다투는 일뿐이니 근래에 각국이 교화로 위주 하매 공법과 경리로 조처하는 도리가 있어 화평을 보전하기 힘쓰니… 상업을 힘쓰는 나라들은 세상이 두루 평안 무사하기를 바라며… 남의 나라가 약해져가는 것을 더욱이 근심해 아무쪼록 붙들어 강하게 만들기를 원하는 바이다.”
    영토보다는 시장을 원하며 약해진 나라를 강하게 만들기를 원하는 바는 그 나라에 보다 많은 상품을 팔기 위함이다. 이것이 통상의 장점인데 이것은 식민지가 모국에서 독립해야 비로소 가능하며 미국에게 영토 야심이 없는 이유이다.1차 세계대전에서 패한 독일이 다시는 재기하지 못하도록 가혹한 배상금을 부과한 베르사유 강화회담을 보고 케인스가 <평화의 경제적 귀결>이라는 책으로 항의한 것도 같은 내용이다. 독일의 구매력이 떨어지면 이웃 국가들의 매출이 동반하락하기 때문이다.그 교훈으로 2차 세게대전의 종결에는 마샬 플랜으로 독일시장을 살렸다. 이승만은 반세기 전에 이 점을 깨달은 것이다. 후일 이 깨달음을 학문적으로 구체화한 것이 그의 박사학위논문 <미국 영향하의 중립>이다.여기서 중립은 전쟁 상태에 있지 않는 비교전상태를 의미한다. 그의 논문은 비교전국가(미국)가 전시에도 교역할 수 있는 자유와 권리가 이를 반대하는 영국을 제압하고 성취돼 가는 초기 통상법제사를 추적한 것이다.그의 학위 논문은 아담 스미스의 언급에서 시작한다.“아담 스미스 시대 이전에는 오랫동안 유럽에서의 통상의 기조는 무력의 문제였지 권리의 문제가 아니었다.”
    유럽의 식민 모국은 영토를 점령한 자신의 식민지 시장을 다른 나라에게 개방하지 않았다. 신생 독립국 미국은 최대 농산물 생산국이었는데 시장이 매우 제한됐다.미국은 모든 지역에 자유로운 시장접근을 원했고, 이것은 식민지들이 독립국가로 전환될 때 가능한 것이었다. 미국은 영토 점령보다도 시장을 원했던 것이다.독립 이후 미국의 역사는 모든 나라가 식민제도를 청산하고 자유롭고 우호적으로 통상하는 제도를 범지구적으로 구축해가는 역사이다. 영국 식민지 스코틀랜드 백성인 스미스가 이 점을 꿰뚫어본 경제학자이다.

    미국은 영토보다 시장에 관심
    스미스는 호소한다. 아메리카 대륙을 독립시키면 “대영제국은 그와 평화를 유지하는 데 드는 비용에서 헤어 날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혜택이 돌아가는 자유통상으로 (평화를) 이룩할 것이다.”그러므로 “타국을 정복하는 것보다 통상을 하는 편이 낫다.” 필리핀 총독을 지낸 우드 장군이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가 온 세계의 식민지에서 문제를 일으키게 만들었다”고 들끓는 식민지 문제의 책임을 윌슨에게 돌렸을 때 이에 대해 윌슨은 미국 정부 역시 필리핀의 독립에 대해 확실한 결정을 내려야만 한다고 답변했다.카네기는 미국이 스페인으로부터 2000만달러에 인수한 필리핀에 2000만달러를 기부할 것을 제의했지만 필리핀은 반응하지 않았다. 카네기는 왜 그랬을까. 자유통상의 능력을 갖춘 독립국으로 전환되는 식민지가 많으면 많을수록 미국에는 시장이 되어 이익이 되나니 미국이 영토적 야심이 없는 근본 이유가 된다.공리주의 철학자 벤담도 그의 저서 <보편적 영구평화계획>에서 영국을 필두로 모든 식민 모국이 과감하게 식민지를 청산할 것을 주장했다.그 과정에서 등장하는 문제가 식민지의 독립 승인과 그들의 권리 인정이었다. 여기에 근거해 이승만이 한국의 독립 권리를 영토적 야심이 없는 미국에 집요하게 추궁한 것이 그의 외교 독립론이다.


    출처 : 미래한국(http://www.futurekorea.co.kr) 


  3. 3편 - 자유주의의 기원, 기독교를 간파하다

    내용
    이승만은 프린스턴대학의 역사학, 정치학, 경제학과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당시에는 학과가 분화되지 않았다. 동시에 그는 프린스턴 신학원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학위 취득을 목적으로 하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이승만은 동진하는 서양세력에서 선교와 통상의 중요성을 꿰뚫어본 한국에서 거의 유일한 당대 인물이다. 그리고 그 뒤에 자유주의가 있음을 간파했다.그가 자유를 발견한 것은 배재학당에 등록하면서이다. 서재필은 그의 본보기가 됐다.
    여기서 그는 사서삼경을 읽던 위정척사의 과거 응시자에서 자유주의 정치학도로 변신했다.같은 시기 그에게 커다란 영향을 준 인물이 후일 세브란스 의학대학을 세운 제중원 선교의사 에이비슨 박사이다. 거의 매일 찾아가서 영어를 습득하며 대화를 나눴다. 후일 대통령이 됐을 때 이승만은 회고했다.“에이비슨 박사는 그가 이 땅에 전한 기독교 정신으로부터 오는 자유주의 사상의 상징으로서 본 대통령[이승만]의 신실한 친구이었으며 또 본 대통령의 청년 시기에 기독교 민주주의의 새 사상을 호흡케 하였다.”

    기독교 정신에서 배운 자유주의
    서세동점을 맞이해 조선, 청, 일본이 각기 서로 다른 정신세계를 찾았다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일본은 신도(神道)를 강화했고 중국은 유교에서 엉거주춤한 형국이었는데 유독 조선만이 기독교를 수용해야 할 새로운 정신으로 봤다.일본에서 최초로 서양 사정을 수입했다는 후쿠자와는 서양문명 뒤에 있는 정신에 대해서 별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러자 니토베가 일본의 종교는 무사도(武士道)라고 주장하는 논란거리 책을 썼다. 무사도의 성경은 칼이다.그래서 일본 작가 나쓰메는 영국에 유학해 서구문명을 부러워하던 가운데 러일전쟁에서 승리하자 태도를 바꿔 우수한 일본문명의 증거라는 글을 써서 서구의 복장까지 흉내 내던 당시 분위기를 일거에 국수주의로 바꾸어 놓는 데 일조했다.
    한편 중국에서 최초로 서구 자유주의를 수입한 엄복은 서구문명 뒤에 자유라는 사상이 있음을 알고 당시 유행하던 양무(洋務)운동을 비판했지만 그 자유주의의 기원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그 결과 일본은 무력에 의한 국가 자살로 치달았고, 중국은 공산주의에 빠져 버렸다. 정신의 공백은 이처럼 무섭다.그러나 이승만은 서구문명 뒤에 있는 자유주의의 기원이 기독교였음을 알아차렸다. 앞서 이승만과 에이비슨의 관계에서 언급했듯이 이승만은 에이비슨 박사를 한국 땅에 전한 “기독교 정신으로부터 오는 자유주의의 상징”이라고, 본 그대로 기독교와 자유주의는 불가분의 관계임을 인식했다.
    그래서 “이[기독교]로써 근본을 삼지 않고는…자유 권리를 중히 하려도 평균한 방한을 알지 못할지라.” 그 이유는 “대한에 자초에 유교가 있어 정치와 합하여 행하여 세상을 다스리기에 극히 선미한 지경에 이르러 보았은즉, 사람마다 이 교[유교]만 실상으로 행하면 다 이전같이 다시 되어 볼 줄로만 생각하여 다른 도리[기독교]는 구하지 않고 다만 이 도[유교]를 사람마다 행치 않는 것만 걱정하니, 비컨대 어려서 입어 빛나던 옷을 장성한 후에 다시 입으려 한 즉하여 무색할 뿐만 아니라 몸에 맞지 않는 줄은 생각지 못하고 종시 입기만 하면 전같이 찬란할 줄로 여김과 같[기]” 때문이다.
    선미한 경지의 유교시대가 지나고 새 시대가 돼 “찬란한 다른 도리”로써 이승만이 발견한 것이 기독교이다. “이것[기독교]이 곧 지금 세계상 상등 문명국의 우등 문명한 사람들이 인류 사회의 근본을 삼아 나라와 백성이 일체로 높은 도덕지위에 이름이라. 지금 우리나라가 쓰러진 데서 일어나려 하며 썩은 데서 싹이 나고자 할진대, 이 교[기독교]로써 근본을 삼지 않고는 세계와 상통[통상]하여도 참 이익을 얻지 못할 것이[다].” 여기에 더하여 공자는 사람이고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니 “유교는 사람의 도이고 기독교는 하나님의 도”인 고로 “예수교 받드는 나라들이 문명부강 태평 안락하다.”

    기독교야말로 나라 살리는 길
    이승만은 외교권이 빼앗긴 한국이 일제에 의해 외부와 철저히 차단된 채 거대한 감옥으로 변했을 때 기독교에서 유일한 외부 창구를 발견했다. 당시 미국 기독교는 흥왕했다.이를 뒷받침하기라도 하듯이 1907년 한국을 방문한 국제기독청년회 마트 총재는 강연에서 “한국은 근대선교사상 완전히 복음화된 유일한 비기독교국가가 될 것을 나는 확신합니다.나라를 살리는 길은 기독교밖에 없습니다”라고 용기를 불어 넣었다.
    이상재 역시 “한국의 유일한 희망은 기독교에 있다. 다른 나라들도 기독교 진리를 통해서만 부강한 나라가 되었다”라고 전도했다. 이상재는 감옥에서 이승만이 개종시킨 정부 고관 출신이다.이승만에게 기독교가 단지 개인의 신앙 체험에 머무르지 않고 구국의 동력으로 인식된 것은 이런 까닭이었다. 중국과 일본의 기독교가 미약하다는 사실과 대비하며 그는 아시아의 첫 번째 기독교 국가 건설을 목표로 삼아 미국의 건국 목표와 일치시켰다.그가 미국을 주목한 것은, 미국이 기독교 정신에 의해 탄생했다는 것이다. 또한 여기에서 영향을 받은 프랑스 혁명 정신이 현대 자유민주주의와 계몽주의가 돼 전 세계로 전파되는 과정으로 봤으며 그것이 아시아의 끝자락에 있는 한국에서 대미를 이루기 바랐기 때문이다.
    “나중 난 뿔이 우뚝”하다는 것이다.이승만의 기독교입국론은 결실을 거뒀다. 개신교 한국 전파 100년 만에 140배로 커진 1985년 뉴욕타임스는 한국 개신교 선교 백년 기념 기사에서 한국 기독교 인구가 장로교 본산인 스코틀랜드 장로교 인구와 캐나다 장로교 인구와 미국 장로교 인구를 합친 것보다 많다고 보고했다.



    출처 : 미래한국(http://www.futurekorea.co.kr) 


  4. 4편 - 외교독립론의 쌍둥이’ 이승만과 마사리크

    내용
    우리는 흔히 넬슨 제독을 이순신 장군에 비교한다. 이승만의 외교독립론을 비교할 사람이 있을까?
    이승만이 그의 외교독립론의 학문적 논거가 되는 박사학위 논문을 완성한 것이 1910년이고 그것이 프린스턴 대학에서 출판된 것이 1912년이다.그리고 2년 후 1차 세계대전이 터졌다. 이때 체코를 탈출한 사람이 있었으니 프라하 대학 철학교수 마사리크이다.
    체코-슬로바키아는 300년 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식민지였다.이 나라는 당시 세계 최강이었다. 이러한 나라로부터 긴 시간에 걸쳐 식민통치를 받은 체코-슬로바키아 민족은 거의 말살될 지경에 이르렀다. 언어, 종교, 토지를 빼앗겼다. 독립정신은 사라졌다. 이러한 환경에서 체코-슬로바키아 민족의 부활을 촉구하는 이가 나타났으니 그가 자로 마사리크 교수이다.이승만과 마사리크는 거의 가망이 없는 상태에서 조국의 독립을 믿었다. 두 사람 공히 사형 선고를 목전에 둔 적이 있었으며 폭력과 무력을 혐오하는 평화주의자에 왕조의 해체를 주장하는 공화주의자가 됐다. 부인도 모두 외국인이었고 독립운동 과정에서 아들을 전염병으로 잃었다는 점마저 닮았다.

    칸트의 영구평화사상 신봉한 책벌레들
    두 사람 모두 칸트의 영구평화사상을 신봉했다. 이승만은 감옥에서조차 잠시도 책을 손에서 떼지 않았을 정도로 독서광이었다. 마사리크 역시 책벌레였다.모두 문필가로 여러 책을 썼다.
    이승만이 ‘일본내막기’를 써서 일본제국의 도발과 몰락을 예측한 것을, 마사리크가 ‘자살론’을 발표하여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이른바 국가자살의 길로 빠지는 것을 예측한 것과 나란히 둘 수 있다.이승만이 한글보급과 국민계몽을 목적으로 한국 최초의 일간신문인 ‘매일신문’을 창간할 무렵, 마사리크 역시 비슷한 목적으로 잡지 ‘학술진흥’을 창간했다.이승만은 영어사전을 통째로 암기했고 마사리크는 라틴어사전을 통째로 외웠다. 두 사람 공히 모국어 이외에 4개 이상의 언어를 이해할 수 있는 당대의 최고 지성인이었다.
    국내에 가족을 두고 해외에 거점을 둔 망명독립지사, 개혁가, 언론인, 박사, 교수, 학자, 대의원, 저술가, 외교가, 웅변가, 선전선동가, 평화주의자였다.가장 중요한 공통점은 두 사람 모두 외교독립론을 우선적으로 주창했다는 사실이다.
    그 과정에서 두 사람 모두 역시 학자-교수 출신인 평화주의자 미국 대통령 윌슨의 정치사상에 크게 기대하고 그를 목표로 외교활동을 했다.이승만과 마사리크 모두 성격이 급했다. 측근 정치를 선호했으며 정적에 대해 관대하지 않았다. 이승만이 독선적이라고 말하지만 마사리크 또한 고집불통의 독선적인 인물이다. 조건 없는 충성을 요구했다. 윌슨 역시 그 같은 면이 강했다.“나는 솔직히 말해서 스코틀랜드 장로교인의 후손이라서 완고하다.” 윌슨은 비판에 매우 민감했으며 침지 못했다. 이승만과 마사리크가 독선이라고 비난받는 이유는 그들의 시야가 깊고 원대했기 때문이다.합스부르크 제국의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강제합병이 세르비아에 대한 선전포고를 거쳐 영국, 프랑스, 러시아, 그리고 미국을 전쟁에 불러들인 서곡이라고 마사리크는 인식했다. 이와 비슷한 예로 일본제국의 한국합병이 만주사변을 거쳐 중국 그리고 미국을 전쟁에 불러들인 전초라고 이승만은 예측한 바 있다.

    공산주의의 핵심을 뚫어 보다
    대부분의 한국 독립지사들이 사대주의 틀에 갇혀서 중국에 또는 이념에 사로 잡혀 새로 등장한 소비에트러시아에, 대부분의 체코-슬로바키아 독립지사들이 범슬라브주의에 현혹돼 제정러시아에 커다란 기대를 건 것은 당시로서는 자연스런 안목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이승만과 마사리크가 모두 이를 탈피 세계 대세를 정확하게 읽고 미국을 이용해 조국을 독립시키려는 외교정책을 밀고 나가 마침내 성공했다는 공통점은, 오늘날은 당연하게 보일지 모른다.그러나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는 아직 강대국이 아닌 미국의 국제적 지위를 고려하면 매우 어려운 선택이었다고 아니 할 수 없다. 그만큼 선견-선각이었다.이승만은 줄기차게 중국, 러시아, 일본의 세력균형 완충장치로서 동아시아 평화에 있어서 한국의 독립이 필수적임을 외교선전을 통해 미국조야에 역설했고 마사리크 역시 러시아,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세력균형 완충지로서 유럽 평화에 있어서 체코-슬로바키아의 역할을 미국에 강조했다.마사리크는 마르크스를 비판하는 최초의 조직적 저서를 쓴 사람답게 마르크스주의의 가장 격렬한 반대자였고 이승만은 한반도에 대한 러시아의 야심을 청년기부터 인식하고 있었다. 두 사람 모두 반소, 반공주의자가 될 수밖에 없음은 당연한 귀결이다.
    이승만이 미국의 개신교, 민주주의, 자본주의에 편승한 것은 마사리크가 미국의 개신교, 민주주의, 자본주의에 기댄 것과 다를 바 없다.그럼으로써 이승만은 조국의 존재를 그 역사에서 최초로 대륙세력이 아닌 해양세력에서 찾은 만큼, 마사리크 역시 시야를 넓혀 모국의 존재를 그 역사에서 처음으로 범슬라브주의가 아닌 전 유럽내지는 전 세계 속에서 인식했다.이승만은 상해의 임시정부 본부와 별도로 워싱턴의 구미위원부에서 미국을 상대해 외교활동을 했으며 마사리크 역시 파리 임시정부 본부와 별도로 런던사무소에서 처음에는 영국과 프랑스 후에는 미국을 외교적으로 상대했다는 유사점도 눈길을 끈다.마사리크와 이승만은 외교독립론의 쌍둥이다.
    이승만이 1910년에 책으로 쓰고 마사리크가 1914년에 실천에 옮겼으니 이승만이 선구자인 셈이다. 이 점이 외교독립론에 있어서 이승만의 독창성이다.



    출처 : 미래한국(http://www.futurekorea.co.kr) 


  5. 5편 - 이승만의 ‘독립 공채표’

    내용
    무장독립에는 천문학적 재정이 소요된다. 러일전쟁의 승자 일본을 이기려면 일본처럼 런던시장에서 기채(起債)할 정도의 실력이 있어야 한다.
    그렇게 모집한 돈도 모자라 나중에는 자금난에 허덕였다. 전비가 모자라기는 러시아도 마찬가지였다.
    이승만은 외교독립을 주장했다. 양자 모두 돈이 드는 것은 마찬가지이지만 아무래도 후자가 훨씬 경제적이다. 체코-슬로바키아를 300년 만에 독립시킨 마사리크는 외교독립운동 4년 동안 약 100만 달러를 지출했다. 그는 “이처럼 저가의 혁명은 역사에 없을 것이다”라고 방점을 찍었다.당시 미주에 거주하는 우리 동포의 수는 대체로 8000명에 지나지 않았다. 1902년 알렌이 시작한 하와이 노동이민을 1905년 일제가 정지시켰기 때문이다.이 인구 가지고는 어린이, 노인 할 것 없이 1인당 평균 100달러 이상 구매해야 100만 달러가 된다. 당시 하와이 노동자의 월급이 18달러에 불과했으니 1가구당 반 년 치 수입에 해당하고, 4인 가족이라면 2년 치에 해당한다.
    이승만은 상해임시정부의 임시대통령에 취임하고 1919년 9월 1일 미국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명의로 공채표를 발행했다. 이른바 ‘독립’ 공채표이다.이것은 공채가 아니라 공채표이다. 영어로 표현하면 ‘certificate of indebtedness’ 또는 ‘certificate of bond’이다. 이승만이 발행한 것의 영문이름은 전자이다.
    공채와 공채표는 무엇이 다른가?당시 미국에는 청천법 ‘blue-sky statutes’라는 것이 있었다. 실체가 없는 단체 또는 부실한 단체가 마치 푸른 하늘만을 담보로 채권을 발행해 투자자들의 손해를 입히는 것을 막기 위한 법이다.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미국 법률의 눈에는 승인받지 못한 정부로서 법률적인 요건이 갖춰지지 않은 단체에 불과했다. 이러한 단체가 공채를 발행하는 것은 불법이다. 따라서 이승만은 공채를 발행하지 못하고 공채표를 발행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을 설명하려면 거의 같은 시기인 1920년 1월 21일 아일랜드 정부의 드 바레라 대통령이 발행한 공채증명서의 예를 드는 것이 적절하다. 당시 아일랜드 정부는 미국 정부가 승인하지 않은 상태이었다. 드 바레라는 1919년 6월에 미국으로 모금하러 떠났다.
    1845년 이래 연속 4년 동안 아일랜드에는 감자 흉년이 들었다. 이때부터 1910년대까지 약 60년 동안 아일랜드를 떠난 인구가 500만 명이었다. 대부분 미국에 정착했다.아일랜드계 미국인 가운데에는 이미 상원의원, 주지사, 대법원판사 등이 배출됐다. 이것이 드 바레라가 미국에 도착했을 때 그의 자산이다.미국은 영국 편이었기에 드 바레라의 입국을 환영하지 않았고 그의 독립운동도 지원하지 않았다. 윌슨 대통령은 드 바레라의 접견도 거부했다. 1차 세계대전의 뒤치다꺼리인 파리 강화회담 참석도 거절했다.

    아일랜드 보다 한발 앞선 이승만의 공채표 발행
    처음에 드 바레라는 공채를 발행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곧 이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됐다.
    영국계 미국인으로부터 집중 공격을 받았다.보스턴의 출판업자는 윌슨 대통령에게 편지를 보내 이를 막으려 했다. “드 바레라가 공채를 판매하는 것은 사기죄에 해당한다.” 어떤 상원의원은 “미국과 평화관계에 있는 국가에 대항하는 군사적 임무”는 기소감이라고 주장했다.월스트리트저널도 반대하는 칼럼을 게재했다. 윌슨 대통령도 미국에 사는 이민자들이 두 나라에 속하는 이른바 양다리 걸침(hyphenism)을 경계했다.이 문제를 해결해 준 사람이 후일 미국 대통령이 되는 프랭클린 루스벨트이다. 그는 해군 차관을 그만두고 본업인 변호사로 돌아갔다. 그는 공채발행은 위법이므로 이를 피해 공채표를 발행하는 우회적인 방법을 조언했다.공채표의 소지자는 장차 아일랜드가 독립해 국제적으로 승인을 받으면 아일랜드 정부가 발행하는 공채와 교환할 수 있거나 현금으로 수령할 수 있다. 드 바레라는 이 합법적인 방법으로 500만 달러를 모금하는 데 성공했다.
    이승만이 발행한 공채표는 영문, 한문, 국문으로 적혀 있다. 국문 문장은 다음과 같다.<대한민국 공채표. 이는 대한민국 정부가 이 증표를 가진 사람에게 금화 일백 원을 채부한 것을 증거함이니, 북미합중국 정부가 대한민국을 승인한 후 1년 내로 대한 경성에서 대한정부 재무부 총장에게 이 표를 들이면 곧 합중국에서 통용하는 금화의 대등으로 보상하기를 대한민국의 명예와 신용으로 담보하노니, 이 보상 금액은 현금으로나 대한민국의 공채증권으로 대신하거나 대한민국 정부 재무부 총장의 편의를 따라 처리할 것이며, 이식은 소불하며 연에 백분지 4로 정하며 이상에 말한 대로 보상할 때까지는 매년 백분지 6의 이식으로 계산함. 대한민국 원년 9월 1일. 대한민국 집정관 총재 리승만. 특파주차구미위원장 김규식.>이 공채표는 미국 관계 법률에 맞게 작성됐다. 드 바레라가 발행한 공채표도 이와 유사하다.
    흥미로운 사실은 이승만이 발행한 공채표의 발행 날짜가 드 바레라가 발행한 것보다 4개월 앞섰다는 것이다. 이승만은 누구와 상의한 것일까? 이승만은 미국 대학에서 법을 공부했으므로 이를 알고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이에 대해 드 바레라는 수학 교수였다. 철학 교수였던 마사리크는 아예 미국에서 공채표를 발행하는 것을 시도하지 않았다. 그는 거부로부터 후원을 받았다.


  6. 6편 - 이승만이 朝美조약에 매달린 이유

    내용
    이승만의 학위논문 제목 <미국 영향 하의 중립>에서 ‘중립’의 의미는 단순한 비교전상태를 의미하는 것뿐만 아니라 평화의 세 가지 권리 가운데 하나이다.
    첫째, 중립은 주변국에서 전쟁이 임박했을 때 평화를 선택할 수 있는 권리이다.
    둘째, 평화의 보장은 평화에 도달했을 때 그 평화가 계속되도록 확실하게 조치하는 권리이다.
    셋째, 군사동맹은 장차 국가가 공격을 받을 때 공동으로 방어하는 연합의 권리이다. 이것이 칸트의 권리의 정의이다. 이승만은 그의 학위논문에서 중립을 권리로 정의했다.이승만은 한국전쟁의 휴전에 임할 때 미국에 대해 평화의 군사동맹 권리를 끈질기게 요구해 마침내 1953년 한미상호방위조약을 관철시켰다. 이어서 1956년에는 평화의 보장권리로서 한미우호통상항해조약까지 성사시킨 것은 칸트 평화의 세 가지 권리를 이해했다고 볼 수 있다.
    이때 이승만은 젊은 시절 학위논문에서 기록한 대로 1778년 프랑스가 영국과 독립전쟁을 치르고 있는 미국을 상대로 우호통상조약과 방위조약을 동시에 체결한 것을 떠올렸을 것이다. 이 두 조약으로 프랑스는 아직도 전쟁 중인 미국의 독립을 사실상 승인했다. 그만큼 이 두 조약은 독립에 중요했던 것이다.

    1882년 조미우호통상항해조약부터 1956년 한미우호통상항해조약까지
    한미우호통상항해조약의 서문에 ‘미국과 한국 사이에 전통적으로 존재하였던 우의와 평화’라는 문구가 눈에 띈다. 이것은 무슨 뜻인가.
    프랑스는 1862년 프랑스 선교사를 살해한 데 대한 보복으로 베트남왕국을 무력으로 토벌하고 1867년 식민지 코친차이나를 만들었다. 프랑스 선교사의 살해 책임을 응징하려던 병인양요에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조선에서 물러난 프랑스는 같은 방식으로 1867년 군대를 파견해 조선을 보호령으로 삼겠다고 청국에 통보했다.
    미국에 관심을 타진했다. 이에 미국이 유럽세력을 아시아 시장에서 견제하기 위해 조선을 지목하고 서둘러 조약을 추진했다. 국회인준을 받아 1882년 성사시킨 것이 조미우호통상항해조약이다. 이때 이 조약을 주선한 청국의 이홍장이 그 조약에 조선이 청의 속국이라는 문구를 요구했으나 미국은 거절했다.이 조약의 제1조는 ‘대조선 군주와 미국 대통령 및 그 국민은 각각 영원히 영구평화와 우호를 지킨다’라고 적시돼 있다. 이 조약에는 유효기간이 없으며 불평등조항은 후일 개정할 수 있도록 명문화했다. 중요한 점은 개입할 수 있는 거중조정조항이다. 미국이 이 조약에 기대한 것은 통상에 의한 경제적 이득이었다.
    한편 미국은 조선이 통상보다는 안보에 크게 중시함을 깨달았다. 그리고 이 지역이 통상 이익만큼 위험 부담이 높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잘못되면 지역분쟁에 휘말릴 가능성이 높았다.
    매킨리 대통령의 암살로 그 뒤를 승계한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사회진화론의 약육강식을 믿는 정치가였다. 그에게는 유럽에 대항해 신조약시대를 만들 야망이 있었다. 미국은 일본과 여러 가지 복잡한 문제에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미국은 필리핀의 안전이 우선이었고 일본은 조선을 원했다. 일본이민이 미국의 서부지역을 위협했다.
    일본에게는 조선을 병탄했을 때 조선이 미국과 맺은 조약이 걸림돌이었다. 미국은 국회의 승인 없이 조미우호통상항해조약을 방기할 방법을 찾았다. 조약의 유효기간이 없다는 점이 한몫 했지만 방기 형식은 일련의 협정이었다. 이승만이 민영환의 밀사로 미국 국무장관 헤이와 면담하는 그 순간에도 태프트 가쓰라 비밀협정이 준비되고 있었다.
    이승만은 독립운동기간 내내 조미우호통상항해조약을 미국이 일방적으로 방기한 것을 추궁했다.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국무성 문서보관소에는 한 조약서가 잠자고 있다.이 조약은 결코 폐기되지도 않았으며 여전히 완전한 효력을 지니고 있으며 그 합법성 여부에 대해서도 의심한 일조차 없었다.” 의회의 폐기 승인을 받지 않았으니 이것은 틀린 주장이 아니다.

    60년 동안 아시아의 평화를 지킨 한미상호방위조약
    한국의 비극은 그것을 막기 위해 거중조정을 조약으로 약속한 미국의 배신 이외에 강화도조약에서 선언한 독립국의 지위를 늑탈한 일본의 배신에 있다.한국은 일본의 영토 야욕에 첫 번째 희생자이지만 그로 인해 만주와 중국 나아가서 태평양도 내일의 한국이 될 것이다. 그래서 “한국의 운명은 세계 자유민의 운명으로부터 분리하여 생각할 수 없다.”
    이승만은 1905년부터 1945년까지 한 가지 길을 걸어왔다. 세계영구평화와 연계한 한국의 독립이다. 여기에 조미우호통상항해조약이 쐐기처럼 박혀 있다. 이 기간에 그것은 일단 실패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것은 그 후에 정말 필요한 시기를 맞이해 결실로 나타났다.
    1945년부터 1948년까지 지난한 국가건설과 1950년부터 1953년까지 국가방위가 바로 그것이다. 그것이 한미상호방위조약과 한미우호통상항해조약으로 다시 부활했다. “미국과 한국 사이에 전통적으로 존재하였던 우의와 평화”라는 문구가 그 저간의 사정을 말해주고 있다.
    미국이 방기한 조미우호통상항해조약에 대한 이승만의 줄기찬 추궁이 이 정도의 표현으로 남아 있게 됐다. 한미상호방위조약이 체결되는 장면을 지켜본 이승만은 젊은 시절을 상기했을 것이다.“이 조약으로 우리 후손은 여러 가지로 혜택을 입을 것이다.” 우리 후손뿐만 아니라 이 조약으로 지난 60년 동안 동아시아의 평화가 유지됐다.

     


  7. 7편 - ‘한국 독립’ 위해 윌슨 美 대통령에게 위임통치 청원

    내용
    칸트의 영구평화사상 바탕으로 위임통치론 만들어 
    윌슨의 이상은 모든 식민지를 독립시키는 것인데, 여기에는 두 가지 장애가 있었다. 하나는 식민지들이 국제법과 통상조약을 준수할 능력을 갖춘 국제연맹 회원의 자격 조건과, 다른 하나는 식민 모국(母國)의 강력한 반발이었다. 절충으로 나온 제안이 국제연맹 하의 위임통치안이다. 식민지 억압의 족쇄를 풀어주되 국제사회의 일원이 되도록 준비시키자는 취지였다. 이것은 위임통치 지역에 대해 문호를 개방하여 자유통상의 범위를 확대하자는 것이다. 이것이 칸트 영구평화 의무조항 3과 그 보장보록의 실천이다.
    또 하나의 이점은 국제연맹 규약 제22조는 위임통치 지역에서 일체의 군사시설을 세울 수 없고, 거주민의 모병(募兵)도 금지하고 있다. 이것은 칸트 영구평화 금지조항 3의 응용이며 국제분쟁을 피하고자 하는 윌슨의 지략이었다.
    이승만은 윌슨의 민족자결주의가 동유럽 식민지 독립에만 적용됨을 알고 다음 기회를 기다려야 했다. 그는 전쟁 주기설을 믿었다.그러나 그것은 언제 발발할지 누구도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이승만이 차선으로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이 국제연맹에 의한 위임통치였다.
    1919년 3월 3일 이승만-정한경이 윌슨 대통령에게 제출한 청원서에 이것이 분명히 적시되어 있다(영문원본의 정한경 한글번역본).
    “우리는 자유를 사랑하는 2천만의 일흠(이름)으로 각하께 청원하노니 각하도 평화회에서 우리의 자유를 주창하야 평화회에 모인 열강으로 하여곰(하여금) 먼저 한국을 일본의 학정 하에서 …장래 완전독립을 보증하시면 아직은 한국을 국제연맹 통치 하에 두게 하시옵소서. 이러케(이렇게) 할 지경이면 대한반도는 만국통상지(중립통상지)가 될지라. 이러케 하야… 어느 일국이던지 동아(東亞) 대륙에서 침략정책을 쓰지 못할 것이오 동양평화를 영원히 보전할 것이올시다. …자유를 사랑하는 2천만 한인으로 하여곰 이 시대에 다른 나라의 속박을 받게 되면 이로써 세계상 민주정책주의(대의제)가 완전히 발전되지 못할 것이올시다. 각하의 영원평화(영구평화)를 창조하시는 근본 대지(국제연맹)가 모든 발달된 위국적 갈망에 큰 만족을 줄이라 하엿스니(하였으니) 이 대지는 평화회에서 모든 일을 규정하는데 모범이 될 것이라. … 각하께서 잘 주선하야 한국 인민으로 하여곰 천부의 자유를 찻게(찾게) 하시며 한국 인민으로 하여곰 자기가 원하는 정부(독립정부)를 자기들이 건설하고 그 정부 하에서 살게 하시기를 바라나이다.”
    이 문서는 “여러 만국법률사들의 의향을 참작하여” 정한경이 작성한 내용을 이승만이 국제법에 참조하여 검토한 것이다. 최종적으로 안창호가 대한인 국민회 총회 행정위원회를 소집하여 그곳에서 승인하여 정한경에게 동의 공함을 보냈다.

    식민지에 대한 배타적 독점통상을 깨야
    번역의 차이가 있음에도 이 세 가지 표현에 칸트 영구평화사상이 요약되어 있다. 칸트 의무조항 1의 대의제, 의무조항 2의 국제연맹, 의무조항 3의 중립통상지가 갖춰져 칸트 영구평화가 실현되려면 한국을 다른 나라의 속박에 둬서는 안 된다는 내용이다.
    결국 이승만이 칸트 영구평화사상에 가장 근접했음을 나타내는 문서가 이승만-정한경이 작성하고 안창호의 대한인 국민회 행정위원회에서 승인한 국제연맹 위임통치 청원서다. 그러나 이 문서의 중요성은 여운형의 후원으로 김규식이 작성하여 파리강화회의에 제출한 위임통치안과 비교하면 알 수 있다.
    김규식의 문서에는 칸트 사상이나 국제법의 기초가 전혀 없고 인도주의로 호소하고 있다. 당시 열강이란 모두 식민지를 갖고 있었는데 식민지의 인도주의 호소 따위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이 문서의 또 다른 중요성은 그 안목이 세계의 지성과 일치하였다는 점이다. 케인스는 식민지 재배분에 열중하는 승전국 태도에 크게 실망하여 한 세대가 지나기 전에 또 하나의 대전이 일어날 것이라고 예측했다.평화회의 영국 대표직을 사임한 케인스는 자신의 주장을 <평화의 경제적 귀결>이라는 제목으로 출판했다. 이 책은 베스트셀러가 되어 1년 이내에 12개국 언어로 번역되었다.
    일본에서는 ‘동경경제신보’에 5회에 걸쳐 연재했다.
     그로부터 3개월 후 동아일보에 다음의 사설이 등장했다. “아담 스미스 씨는 자유무역을 학리(學理) 상으로 또 실제상으로 주장하여 동국(同國)의 국제무역에 우이(牛耳)를 집(집)케 하였도다. …그러나 금번 국제연맹 문제가 발생한 후로 국제 상 알력을 생(生)케 하는 장벽을 일제히 철거하고 … 해양의 자유와 무역의 자유도 창도되어 평화의 신낙원을 세간에 건설하려 하였으나 구사상에 심취한 자들이 아직 구각을 탈치 못하였으므로 그 이상은 … 구시대로 퇴화하여 자유의 무역이라 하는 문제도 파리 시가에 장사(葬事)하고 보호무역주의로 각국이 모두 관세의 장벽을 신축하여 무역상 국제경쟁에 우각(牛角)을 상교(相交)하는도다.” 이 사설은 스미스가 자유통상이 곧 평화라는 이론을 설득함(牛耳를 執)을 소개한 다음 그럼에도 케인스가 지적한 대로 파리강화회의는 보호무역으로 역행하여 장차 전쟁(牛角相交)이 염려된다는 내용이다.
    케인스는 윌슨의 14개 조항 가운데 두 조항에 주목했다. 첫째, 평화에 동의하고 그것을 지키는 데 협력하는 모든 국가 사이에 모든 경제적 장애의 제거와 동등한 교역조건의 제정(3조). 둘째, 국제연맹의 창설(14조). 케인스는 이 둘을 연결하여 다음과 같이 구체적인 적용을 예시했다. “국제연맹 하에서 자유무역연맹이 반드시 필요하다. 회원들 사이에는 관세를 부과하지 않는다. 앞으로 10년 내에 자발적인 방법으로 독일, 폴란드, 과거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터키 제국에 속했던 신생 독립국가, 그리고 위임통치 국가(Mandate States)가 참여한다.” 케인스의 자유통상 제안에 위임통치국가까지 포함한 것이 주목된다.
    식민지에 대한 배타적 독점통상은 식민 모국 이외에 다른 국가에게 통상의 기회를 주지 않는다.
    그러나 식민 상태에서 독립되거나 위임통치 하에 놓이게 되고 이러한 국가의 수가 많을수록 개방적 경쟁적 자유통상으로 모두에게 득이 된다. 그래서 케인스는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기대하여 “민족자결주의는 단순한 수사가 아니다”라는 윌슨의 의회 연설을 인용한다. 윌슨과 케인스의 생각의 배경에는 칸트의 ‘영구평화론’이 있다. 이승만의 생각도 그렇다.
     


  8. 8편 - 이승만과 세브란스의 인연

    내용

    박용만의 네브라스카 한인소년병학교는 이승만 덕분에 가능

    독립노선에 있어 박용만은 이승만과 대조되는 인물이다. 그는 무장투쟁을 주장했다고 알려졌다. 그 목적을 위해 그가 세운 학교로 이른바 ‘한인소년병학교’를 내세운다.
    그러나 이것은 정식 명칭이 아니다. 우선 명칭부터 살펴보자. 이 학교를 졸업한 홍승국(후에 연희대 상경대학장)은 자필 이력서에 미국 네브라스카 주(州) ‘헤이스팅스 시(市) 대학부속 중학교 2년 수료’에 이어 ‘헤이스팅스 시 시립중학교 졸업’이라고 기록했다.기간은 1910년 9월부터 1914년 6월까지다. 홍승국이 입학한 그 다음해 1911년 3월 헤이스팅스 대학의 잡지(‘The Hastings College Collegian’)은 그와 함께 5명의 한국 학생의 입학을 보도하면서 학교 명칭을 ‘The Hastings College Academy’라고 적고 있다.

    또 행간에 따라서 한인여름학교(The Korean Summer School)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추측컨대 이 학교에서 한인 학생들은 중학교 과정을 배우면서 여름에 박용만의 지도 아래 군사훈련도 받았다.

    당시 한국 교포신문들이나 지역신문들이 박용만의 군사훈련을 강조하여 세칭 한인소년병학교라고 부른 듯하다. 이 학교에서 이승만이 여러 차례 강연을 했다. 흥미로운 점은 이 학교의 설립에 이승만의 역할이 컸다는 점이다.미리 말해두지만 이승만은 이 학교를 군사학교보다는 한국 청년들의 일반 중학과정 학교로 생각하고 도와줬다는 점이다.
    이제 그 전말을 보자. 1909년 프린스턴 대학에 있던 이승만에게 헤이스팅스 대학의 재무이사 존슨이 찾아왔다. 그가 대학기금을 모금하려고 동부를 방문한 것이다. 이때 이승만은 박사학위 논문을 제출한 상태여서 시간적 여유가 있었다. 여기서 동부란 프린스턴을 가리킨다. 당시 신문기록이다. “이번에 동부를 방문했던 존슨 씨는 올해 프린스턴 대학을 졸업한 한국 학생 고문 이승만 씨를 만났고, 이곳(헤이스팅스)에 거주하는 박처후 박용만 등 한인 지도자들을 만나 대학이 도울 수 있는 방법 등을 논의했다. (그 결과) 헤이스팅스 대학은 여름학교가 대학 시설을 쓸 수 있도록 결정했으며 여름학교는 한인들이 스스로 운영할 것이다”
    여기서 여름학교란 한인여름학교(The Korean Summer School)다. 이 기사에 따르면 존슨이 대학기금을 마련하기 위해 이승만을 만난 직후 한인여름학교가 헤이스팅스 대학에서 정식으로 개강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1910~1912년이었다. 다시 말하면 한인여름학교가 여름 동안 헤이스팅스의 대학 시설을 이용할 수 있었던 것은 이승만의 어떤 도움 덕택이었을 것을 강하게 암시하고 있다.

    세브란스가 헤이스팅스 대학에 기부

    아쉬운 것은 존슨이 동부에서 이승만을 만나 어떤 도움을 받았는지 기록이 없다. 다만 세브란스가 1913년 6월 25일 갑자기 타계했을 때 그의 수첩이 발견되었는데, 자선을 약속하고 이행하지 못한 미지급 내역서가 발견되었다(New York Times, November 27, 1913). 달러 이하 단위의 금액까지 꼼꼼하게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약속한 총액은 알 수 없고 남은 잔액들이다. 그 목록 가운데 ‘네브라스카 헤이스팅스 대학’ 앞으로 ‘5천 달러’가 적혀 있었다. 조건은 대학이 ‘10만 달러를 모금’하는 것이다. 대학기금 10만 달러 모금에 세브란스가 기부를 약속했고 남은 잔액으로 추정된다.
    그렇다면 존슨 재무이사를 세브란스에게 소개한 사람은 누구였을까. 이승만과 세브란스의 인연은 각별하다. 첫째, 1908년 한국 주재 미국 선교사 에이비슨, 언더우드, 헐버트가 동시에 안식년을 맞아 미국에 왔다. 그들은 미국에서 쉬지도 않고 한국선전(Korea Campaign)을 시작했다. 목적은 기금 모금과 선교사 모집이었다. 목표액은 10만 달러였고 목표 인원수는 20명이었다. 여기에 이승만이 참여했다. “참으로 이상스러운 일은 언더우드, 헐버트, 나(에이비슨), 우리 셋은 그해 우리 사업을 위해서 미국 전역을 연설하러 순회할 때 이승만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게 되었다는 점이다”
    여기에 세브란스가 참여했다. “한국선전 위원회는 오늘 회의를 열고 장시간 세브란스 씨와 토론한 후 다음 사항을 결정했다.” 그들이 순회 연설한 도시는 클리블랜드, 뉴욕, 필라델피아, 보스턴, 시카고, 버펄로, 밀워키, 세인트루이스, 인디애나폴리스, 캔자스, 미네아폴리스, 피츠버그다. 클리블랜드에서 이승만은 세브란스 교회에서 연설했다. 그의 일기다. “기념교회. 한국선전을 했다. 언더우드 박사의 운동. 클리블랜드 오하이오 우드랜드 교회 (장로회) 일요일 아침 예배. 세브란스 씨 교회 (병원). 레이크우드 장로교회 일요일 저녁예배. 클리블랜드 오하이오”(1908년 11월 29일). 이틀 전에는 클리블랜드 갈보리 교회에서 연설했다. 이 교회는 세브란스 주치의로서 그의 뜻을 받들어 서울 세브란스 의과대학에서 평생을 봉직한 러드로우 교수의 교회였다. 그는 이승만의 친구다. 한국선전의 결과 9만 달러가 모금되고 20명의 새 선교사를 파송할 수 있었다.
    둘째, 1911년 세브란스의 외동딸 엘리자베스가 남편과 함께 세계일주 여정에서 한국을 방문한 것은 6월이었다. 여기서 귀국해 있던 이승만을 만나 저녁을 함께 했다.
    그녀의 일기 한 토막이다. “에이비슨 박사와 점심을 먹었다. 저녁이 되자 언더우드 박사가 우리를 멋진 자신의 집으로 데리고 갔다. 여기서 기독청년회관의 이(승만) 박사와 김(정식) 씨를 만났다. 비가 왔지만 아주 즐거운 저녁이었다” 기독청년회관의 이 박사(Dr. Rhee)란 이승만 뿐이다. 이러한 여러 가지 인연으로 이승만은 세브란스 집안과 가까웠고, 그가 존슨 재무이사를 세브란스에게 소개시켰을 것이다. 이 소개로 세브란스는 거금을 헤이스팅스 대학에 기부했고 한인 학생들은 여름에 대학 내의 시설을 쓸 수 있게 된 것이다.
    세브란스가 약속한 미지급 기부금은 그 아들이 지불했다. 존슨 재무이사는 1948년 12월 15일 대통령 이승만에게 안부 편지를 보냈고, 이승만은 1949년 1월 27일에 답장을 했다. 박용만이 한인 학생들을 군인으로 훈련시킨다고 알려졌지만 존슨 이사가 이해하기로는 기독교 교육이 우선이었다.
    특히 기독교 선교사로 교육시켜 한국 선교사업에 필요한 인재를 양성하는 데 있었다.여기에 세브란스의 관심과 일치했고 이승만은 그렇게 설득했을 것이다. 이 학교 졸업생들은 한결같이 군인의 길을 걷지 않았다. 이승만은 무장독립운동을 선호하지 않았다.


    출처 : 미래한국(http://www.futurekorea.co.kr) 


  9. 9편 - 이승만이 ‘집정관 총재’를 ‘President’로 쓴 까닭은?

    내용

    선전과 외교로 자신들을 알릴 수 있는 칭호가 President였다

    1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프라하는 곧바로 계엄 상태가 되었다. 프라하 대학 철학교수 마사리크는 가족을 남긴 채 단신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파리에 잠시 머물던 그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회 체코 출신 의원이라는 신분을 이용하여 임시정부를 세웠다.그는 이번 세계대전이 300년 만에 오스트리아-헝가리로부터 조국을 독립시킬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다.그는 대통령이라고 스스로를 소개했다. 9개국 언어를 구사하는 능력을 마음껏 구사하여 세계의 동정을 구하는 외교와 선전 방략을 택했다. 런던에서 그는 강연과 함께 세계대전의 목표와 전후(戰後) 질서에 관한 책자를 출간했다.
    마침내 그는 미국으로 건너가 윌슨과 독대할 수 있었다. 그를 설득해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지구상에서 없애고 합스부르크 왕가가 누대로 지배하던 체코와 슬로바키아를 한데 묶어 신생 국가로 독립시키는 데 성공한다.
    아무도 그에게 임시정부의 조직과 대통령의 지위를 부여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에 개의치 않고 신뢰하는 소수의 제자만으로 구성한 임시정부를 마침내 체코슬로바키아의 합법적 정부로 인정받는 데 성공했다.다시 말하면 그의 임시정부는 그 정당성과 합법성을 국내에서 인정받기 전에 국외에서 인정받은 것이다.
    그의 정적(政敵)들은 그가 대통령을 참칭했다고 비난했다. 그러나 그는 결과를 보여줬다. 그는 말했다. “나와 나의 정부를 인정해라. 나는 기다리겠다. 그러나 인정하지 않겠다면 나는 나의 길을 가련다.” 그가 이처럼 용기 있는 행동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체코-슬로바키아의 지도자들은 러시아가 구세주라고 생각하고 그곳만 쳐다보았기 때문이다.그러나 마사리크는 러시아가 부패했고 자신들의 조국을 독립시켜 줄 능력이 없다고 파악하고 미국에 기대했다. 러시아가 혁명으로 망하자 마사리크의 방략이 옳았음이 드러났다.
    드 바레라는 아일랜드 독립을 선포한 16명 가운데 하나였다. 모조리 체포되어 전원이 사형 선고를 받았다. 드 바레라는 미국 시민이므로 간신히 사형 집행에서 풀려났다.나머지 15명은 처형되었다. 이것이 1916년 아일랜드 부활절 독립선언이다. 아일랜드는 700년 만에 지배자 영국에 대하여 독립을 선포했다.드 바레라는 수상에 선출되었다. 정확한 명칭은 Priomh Aire, 즉 아일랜드 하원의장이며 동시에 내각 수반이다.영어로 번역하면 Prime Minister와 President of the Ministry를 합친 것이다. 1918년 그는 독립자금을 모금하기 위해 미국으로 밀항한다.당시 미국에는 500만 명의 아일랜드계가 살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직함을 대통령(President)이라고 자칭했다.

    상해 임시정부 대통령에 올라

    미국에는 이미 아일랜드 독립운동의 지도자들이 많았다. 그들은 드 바레라에게 대통령이라는 직함을 사용하지 말 것을 요구했다. 드 바레라는 이런 요구를 묵살했다.그는 미국에 도착하자마자 아일랜드 고유 언어로 표시하는 Priomh Aire와 영어의 President의 차이가 가져오는 효과를 인지하고 있었다. 혹자는 드 바레라가 President of the Ministry의 President만을 교묘하게 사용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드 바레라는 분명하게 President of the Republic of Ireland라고 자신을 밝혔다.

    한성임시정부는 이승만을 집정관 총재로 선출했다. 블라디보스토크의 대한국민의회는 국무경, 상해 임시정부는 국무총리로 추대했다. 이승만은 집정관 총재가 마음에 들었다.그는 즉시 이 칭호를 영어로 President로 번역했다. 여기에 근거하여 이승만은 즉시 워싱턴에 대한공화국 대통령 집무실을 마련하고 활동에 들어갔다.

    먼저 <대한독립혈전기>를 발간하여 대통령 이승만의 사진을 싣고 대통령 선언서를 담아 해외 동포들에게 자신과 신생 공화국을 선전했다. 자신의 사진이 들어 있는 엽서를 만들어 널리 사용하도록 권장했다. 이것은 예전에 농사의 절기를 담은 책력을 배포하며 왕의 권위를 천하에 알리는 방식이다. 내부를 다진 이승만은 외부로 눈을 돌려 세계 열강 지도자들에게 대한공화국의 정부 수립과 자신이 대통령에 취임했음을 알리는 공식 서한을 보냈다. 일본 국왕에게도 보냈다. 그리고 미국 전역을 순회하며 지지를 호소하는 강연을 했다.

    이승만이 집정관 총재를 President로 번역 사용하면서 분란이 일어났다. 그러나 집정관 총재를 영어로 번역할 방법이 달리 없었다.겸하여 세 임시정부를 통합할 필요도 생겼다. 이에 상해에서 통합정부인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며 정부 수반을 대통령으로 수정했다. 1919년 9월 11일 이승만은 국무총리에서 임시 대통령으로 추대되었다. 한국 역사에서 최초의 공화국에 최초의 대통령이 된 것이다. 집정관은 로마 시대의 유산이다.영어로 Regent이다. 지금도 이 직함을 사용하는 공화국이 한 군데 있다. 산마리노다. 이 나라의 수반은 임기 1년의 Captains Regent이다. 두 명이다. 6개월씩 교대한다.

    이것을 구태여 국문으로 번역하자면 ‘집정관 지도자’일 것이다. 이 나라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공화국이므로 그 칭호가 알려져 있고 무엇보다 독립하겠다고, 알아달라고 세계에 호소할 필요가 없는 2000년 공화국의 역사가 있다. 총재는 일반적으로 President로 번역되므로 집정관 총재를 영어로 번역하면 President Regent 정도일 것이다. 이것은 세상에 없는 명칭이다. 이 명칭을 알아달라고 열강에게 소개할 수 없을 것이다. 열강에게 아일랜드의 Priomh를 소개할 수 없었고, Captains Regent로 알릴 수도 없는 것처럼 President Regent 명함을 내밀 수도 없는 노릇이다.
    약소국 외교독립운동 지도자 마사리크, 드 바레라, 이승만 모두 선전과 외교로 세계에 알릴 수 있는 칭호가 필요했다. 그것은 President였다. 이 셋 가운데 이승만이 가장 정직하게 번역했다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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