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브란스가 헤이스팅스 대학에 기부
아쉬운 것은 존슨이 동부에서 이승만을 만나 어떤 도움을 받았는지 기록이 없다. 다만 세브란스가 1913년 6월 25일 갑자기 타계했을 때 그의 수첩이 발견되었는데, 자선을 약속하고 이행하지 못한 미지급 내역서가 발견되었다(New York Times, November 27, 1913). 달러 이하 단위의 금액까지 꼼꼼하게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약속한 총액은 알 수 없고 남은 잔액들이다. 그 목록 가운데 ‘네브라스카 헤이스팅스 대학’ 앞으로 ‘5천 달러’가 적혀 있었다. 조건은 대학이 ‘10만 달러를 모금’하는 것이다. 대학기금 10만 달러 모금에 세브란스가 기부를 약속했고 남은 잔액으로 추정된다.
그렇다면 존슨 재무이사를 세브란스에게 소개한 사람은 누구였을까. 이승만과 세브란스의 인연은 각별하다. 첫째, 1908년 한국 주재 미국 선교사 에이비슨, 언더우드, 헐버트가 동시에 안식년을 맞아 미국에 왔다. 그들은 미국에서 쉬지도 않고 한국선전(Korea Campaign)을 시작했다. 목적은 기금 모금과 선교사 모집이었다. 목표액은 10만 달러였고 목표 인원수는 20명이었다. 여기에 이승만이 참여했다. “참으로 이상스러운 일은 언더우드, 헐버트, 나(에이비슨), 우리 셋은 그해 우리 사업을 위해서 미국 전역을 연설하러 순회할 때 이승만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게 되었다는 점이다”
여기에 세브란스가 참여했다. “한국선전 위원회는 오늘 회의를 열고 장시간 세브란스 씨와 토론한 후 다음 사항을 결정했다.” 그들이 순회 연설한 도시는 클리블랜드, 뉴욕, 필라델피아, 보스턴, 시카고, 버펄로, 밀워키, 세인트루이스, 인디애나폴리스, 캔자스, 미네아폴리스, 피츠버그다. 클리블랜드에서 이승만은 세브란스 교회에서 연설했다. 그의 일기다. “기념교회. 한국선전을 했다. 언더우드 박사의 운동. 클리블랜드 오하이오 우드랜드 교회 (장로회) 일요일 아침 예배. 세브란스 씨 교회 (병원). 레이크우드 장로교회 일요일 저녁예배. 클리블랜드 오하이오”(1908년 11월 29일). 이틀 전에는 클리블랜드 갈보리 교회에서 연설했다. 이 교회는 세브란스 주치의로서 그의 뜻을 받들어 서울 세브란스 의과대학에서 평생을 봉직한 러드로우 교수의 교회였다. 그는 이승만의 친구다. 한국선전의 결과 9만 달러가 모금되고 20명의 새 선교사를 파송할 수 있었다.
둘째, 1911년 세브란스의 외동딸 엘리자베스가 남편과 함께 세계일주 여정에서 한국을 방문한 것은 6월이었다. 여기서 귀국해 있던 이승만을 만나 저녁을 함께 했다.
그녀의 일기 한 토막이다. “에이비슨 박사와 점심을 먹었다. 저녁이 되자 언더우드 박사가 우리를 멋진 자신의 집으로 데리고 갔다. 여기서 기독청년회관의 이(승만) 박사와 김(정식) 씨를 만났다. 비가 왔지만 아주 즐거운 저녁이었다” 기독청년회관의 이 박사(Dr. Rhee)란 이승만 뿐이다. 이러한 여러 가지 인연으로 이승만은 세브란스 집안과 가까웠고, 그가 존슨 재무이사를 세브란스에게 소개시켰을 것이다. 이 소개로 세브란스는 거금을 헤이스팅스 대학에 기부했고 한인 학생들은 여름에 대학 내의 시설을 쓸 수 있게 된 것이다.
세브란스가 약속한 미지급 기부금은 그 아들이 지불했다. 존슨 재무이사는 1948년 12월 15일 대통령 이승만에게 안부 편지를 보냈고, 이승만은 1949년 1월 27일에 답장을 했다. 박용만이 한인 학생들을 군인으로 훈련시킨다고 알려졌지만 존슨 이사가 이해하기로는 기독교 교육이 우선이었다.
특히 기독교 선교사로 교육시켜 한국 선교사업에 필요한 인재를 양성하는 데 있었다.여기에 세브란스의 관심과 일치했고 이승만은 그렇게 설득했을 것이다. 이 학교 졸업생들은 한결같이 군인의 길을 걷지 않았다. 이승만은 무장독립운동을 선호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