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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보

  • 아버지 이경선(가운데)과 아들 이승만(오른쪽). 배재학당 입학전 18세 모습(1893년)<br />그는 황해도 평산군 능내동에서 부친 이경선, 모친 김해김씨 사이에 6대 독자로 출생했으며, 양녕대군이 그의 16대 조상이다
  • 1913년 이승만이 원장직을 맡은 한인중앙학원의 학생과 교직원 일동<br />첫번째 줄 좌측에 이승만
  • 하지중장, 김구와 함께 (1945년11월24일)<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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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구국 투쟁 중 투옥, 1903년 한성감옥에서 애국동지들과 함께(왼쪽 중죄수복장). 모진 옥중생활 중에서도 살아있는 눈빛이 인상적이다.<br />앞줄 오른쪽부터 이정식, 이상재 선생, 홍재기, 강원달, 뒷쪽 오른쪽부터 부친 대신 복역했던 소년, 안국선, 김린, 유동근, 이승인(이상재의 아들)
  • 하와이 한인사회 지도지들 (1913년)<br />하와이에서 활동 중 이승만 박사 환영식에 참석한 독립운동가 고석주 선생(뒷줄 우측 세번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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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마포장 앞뜰에서 잔디를 가꾸는 중 (1946년)<br />
  • 민족통일총본부의 모임에 참석한 이승만 박사 내외 (1946년10월7일)<br />
  • 제헌국회 개헌식 (1948년5월31일)<br />
  • 1904년 한성감옥에서 (왼쪽에서 세번째가 이승만이다)<br />당시 어린이들도 감옥에 있었기 때문에 청년 이승만은 옥중학교를 운영하여 한글과 한문을 가르쳤다.
  • 한인기숙학교 앞에서 교포유지들과 (1913년 4월 13일)<br />
  • 대한민국 건국의 정초인 대한민국 헌법과 정부조직법 서명을 마치고 헌법 공포서를 읽는 이승만 국회의장 (1948년7월17일)<br />
  • 중앙청 광장에서 열린초대 정∙부통령 취임식 (1948년7월24일)<br />
  • 한성감옥의 동지들(안국선, 이승린)과 함께<br />
  • 하와이 호놀룰루 기차역에서 나란히 포즈를 취한 이승만과 박용만 (1913년 4월 20일)<br />한때 결의형제를 할 만큼 일생의 동지였던 두 사람은 독립운동 방법론과 국민회기금을 둘러싸고 대립하여 결국 정적이 되고 말았다.
  • 1948년 8월15일 대한민국 건국<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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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프랑스인 장 드 팡스의 저서 [한국에서:1904]에 실려있는 사진<br />한성감옥 밖에 나온 이승만(중앙)이 헬멧 쓴 아펜젤러로 추정되는 서양인과 대화하고 있다.
  • 이승만 박사가 호놀룰루에 도착한 날 출영객들과 함께 찍은 사진 (1913년 2월 3일)<br />가운데 하와이 레이를 걸친 이승만, 왼쪽 끝이 박용만이다. 이날 그는 부친의 부음을 들었다.
  • 이승만 대통령이 초청으로 내한한 맥아더 장군<br />
  • 1904년 11월 미국에 고종의 밀사로 떠나기전 가족사진<br />오른쪽부터 박씨 부인, 이승만, 아들 태산, 아버지 이경선 옹 (뒤에 서있는 소년은 조카), 맏누님
  • 하와이 교민청년들과 함께 (1913년 7월 19일)<br />
  • 대한민국정부수립기념식장에 참석한 맥아더 장군과 이승만 대통령 (1948년8월15일)<br />
  • 이승만(가장 왼쪽, 당시 29세)이 1904년 고종황제의 밀지를 받아 밀사로 미국으로 건너가 (오른쪽부터)신홍우, 장홍범, 장(교포로 추정)과 함께 기념으로 찍은 사진이다.<br />자신을 저술가로 소개하고 있다.
  • 1913년 하와이에 정착을 시작할 당시 이승만 박사가 살았던 작은 집<br />동포들의 성금으로 활동해야 했던 그는 언제나 최저 수준의 생활을 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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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밀사 자격으로 미국에 도착한 이승만이 워싱턴 D.C.로 향하던 중 시카고에 들려 그곳 한인유지들과 함께 찍은 기념사진<br />오른쪽이 이승만 (사진 : 기파랑 제공)
  • 1913년 하와이 교민들과 함께<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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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국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만나기 위해 예복을 갖춘 이승만 (1905년 8월)<br />
  • 1913년 5월<br />
  • 하지중장, 맥아더장군과 함께<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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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청년 이승만<br />
  • 1914년<br />(사진 : 기파랑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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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청년 이승만<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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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앙청 광장에서 열린 초대 정·부통령 취임식<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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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승만이 워싱턴 D. C.의 조지 워싱턴대를 졸업할 무렵 (1907년 7월)<br />학비는 장학금으로 면제받고, 생활비는 한국과 동양에 관한 강연으로 조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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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지 워싱턴 대학 재학 당시 뉴잉글랜드 지방에서 모인 국제기독학생대회에 참석한 이승만(앞줄 오른쪽 두 번째)<br />
  • 이승만이 여학생 기숙사를 짓기 위해 교포 유지들과 함께 정지작업을 하고 있다. (1916년 12월 25일)<br />
  • 일본 하네다 공군기지에 도착한 이승만 대통령 (1948년)<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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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버드대 재학시절의 이승만과 그의 급우들. 가운데 앉아있는 인물은 브라운대에서 초빙된 국제법 담당 객원교수 윌(M.M.Wilson)<br />재학시절에 샌프란시스코에서 전명운의 스티븐스 암살 사건이 일어남으로 친일적인 교수들과 학생들로부터 냉대를 받았다.
  • 이승만이 1918년에 설립한 남녀공학의 한인기독학원(Korean Christian Institute)의 학생과 교직원 일동. 와이알라에 알리이오라니 스쿨시대 (1918-1921)<br />1층은 교회, 2층에 교실, 3층에 여학생 기숙사가 자리잡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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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프린스턴 대학교 신학부 학생들과 함께 (1909년)<br />이승만은 정치학과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었으나, 장학금 지급 관계로 신학부 기숙사에서 머물렀다.
  • 1918년 이승만이 학교 구내에서 여학생 제자들과 함께 찍은 사진<br />
  • 귀국 후 돈암장에 머물 때의 이승만  (1945년 11월)<br />왼쪽 맨 끝 이박사의 비서 윤치영, 이박사의 오른편은 윤치영의 부인 이은혜 여사. 나머지는 미군정측에서 보낸 경비원들
  • 필라델피아의 소극장에서 개최된 한인대표자대회에 참석했던 대표들의 기념사진 (1919년 4월 14일- 16일)<br />왼쪽에서 세 번째가 민찬호, 둘째 줄의 그 다음이 정한경, 그리고 그 옆에 서있는 이가 서재필이다. 이승만은 서재필 오른쪽에 서있으며 옆 얼굴을 보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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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9년 4월 16일 필라델피아에서 한인자유대회를 마친 <한인대표자대회>의 참석자들.<br />왼쪽에서 첫 번째가 정한경, 세 번째가 이승만이며 중간에 태극기를 들고 있는 여인이 노디 김 양이다.
  • 필라델피아의 <한인대표자대회>가 끝나는 날(1919년 4월 16일)<br /><독립기념관>에 들어가 옛날 미국 건국대통령 워싱턴이 앉았던 자리에 좌정한 이승만. 옆에 태극기를 든 정한경, 그 옆이 노디 김양.
  • 필라델피아 한인자유대회 학생 대표단<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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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1 운동 소식에 접한 서재필과 재미동포들은 4월 14일부터 16일까지 필라델피아 리틀극장에서 제1회 한인의회를 개최하였다.<br />16일에는 한인자유대회를 개최하여 태극기를 앞세우고 시가행진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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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6년 여름 매사추세츠주 노스필드에서 열린 만국 [기독]학도공회에 참가했을 때<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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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프린스턴 대학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었을 때 묵었던 기숙사 방(1909년)<br />기숙사 건물 핫지홀(Hodge Hall)은 지금도 프린스턴 신학대학원의 사무실로 사용되고 있다.
  • 3·1운동 후 1919년 4월초 러시아령 연해주에서 선포된 노령임시정부에서 국무경(국무총리) 겸 외무경으로 임명된 이승만<br />
  • 1910년 6월,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박사 학위(국제정치학)를 받았다.<br />나라잃은 슬픔이 눈가에 서려있는 듯 하다.
  • 이승만이 한성정부의 ‘집정관총재’로 선출된 다음 시카고의 한인교포가 만들어 배포한 홍보용 컬러 우편엽서<br />
  • 이승만 박사(맨 앞, 당시 36세)가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YMCA 성경학교에서 행사를 준비하고 있다.<br />프린스턴대 출신의 이승만은 미국에서 누릴 수 있는 모든 특권을 버려두고 귀국하여 1910년부터 두 해 동안 YMCA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 이승만이 서울에서 선포된 한성임시정부의 집정관총재로 선출된 뒤 미국에서 만들어진 엽서 (1919년4월)<br />
  • 장개석 총통의 진행 방문 영접 (1949년)<br />
  • 1911년 YMCA 성경연구회 학생들을 지도하는 이승만 박사(윗줄 오른쪽에서 두번째)<br />1년 5개월간 한국에 머무르다가 일본의 추격을 피해 다시 미국으로 망명하였다.
  • 이승만이 한성정부의 ‘집정관총재’로 선출된 다음 호놀룰루의 <한인기독학원>에서 개최된 이승만 대통령 취임 축하행사<br />
  • 서울에서 장개석 총통과 함께 (1949년 8월)<br />
  • 라이프지 사진<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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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9년 초가을, 경무대 뒷뜰에서 장작을 패고 있는 이대통령<br />
  • 이승만 대통령 국군평양입성 환영대회 참석연설 (출처:국가기록원)<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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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YMCA의 집회 모습(1911). 집회에서 악기 반주에 맞추어 노래를 부르고 있다.<br />단상에 앉은 언더우드 옆으로 이승만의 모습이 보인다.
  • 집정관총재(대통령) 이승만과 구미위원부 위원장 김규식 (1919년)<br />
  • 서울지구 제1사단 시찰 (1951년)<br />시찰하면서 지프에 올라 즉흥연설을 하는 이승만 대통령
  • 미국 프린스턴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뒤에 귀국, YMCA에 재직하던 때의 이승만<br />
  • 캐나다 출신의 영국 [데일리 메일]지 기자 맥켄지와 이승만 (1919년 7월)<br />맥켄지는 일제의 질곡에 시달리는 한국인의 처지에 깊은 동정을 갖고 있었다.
  • 이승만 대통령 부부의 거제도 방문 (1951년)<br />
  • 맥아더 장군과 작별인사 중 (1951년)<br />
  • 서울YMCA 학감 시절, 주간학교 졸업반 학생들과 함께(앞줄 왼쪽부터 4번째가 이승만)<br />프린스턴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막 귀국한 이승만은 청년들의 우상이었다. 그의 영향을 받아 임병직을 비롯한 많은 엘리트 청년들이 미국으로 유학을 가게 되었다.
  • 호놀룰루에서 이승만이 세운 한인기독교회 임원들과 함께 (1922년 3월).<br />
  • 참석자들과 함께 기념촬영 (1951년)<br />
  • 보병 9사단을 시찰, 장병들을 격려하는 대통령 (1951년 9월)<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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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1년 6월에 <기독학생 하령회>가 열렸던 개성의 한영서원<br />이승만이 앞줄 중앙에 앉아있다. 한영서원은 윤치호가 세운 학교로 지금의 인천 송도고등학교의 전신이다.
  • 3·1절을 맞이하여 구미위원부가 워싱톤 포트랜드 호텔에서 기념식을 갖고 쵤영한 사진이다. (1920년 3월)<br />앞줄 왼쪽 두 번째부터 송헌주, 이승만, 김규식
  • 6·25 전쟁이 중 제주도 제1훈련소를 찾은 이승만 대통령이 밴 플리트 미8군사령관(뒷줄 오른쪽), 훈련소장인 장도영 준장(왼쪽 두번째) 등과 함께 지프를 타고 시찰하고 있다. (1952년7월3일)<br />
  • 정일권 장군과 함께<br />
  • YMCA 성경반 학생들과 함께 (맨 오른쪽에 서 있는 이가 이승만 박사, 1912년)<br />
  • 미국 덴버의 안재창씨 농장에 걸린 태극기 앞에서 독립운동가 임동식, 정한경, 이승만이 포즈를 취했다. (1920년 3월)<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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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2년 3월 9일 서울에서 모인 <감리교회 각 지방 평신도대표 제14기 회의> 참가자들 (둘째 줄 가운데가 이승만)<br />이 회의에서 이승만은 미국 미네아폴리스에서 열리는 <기독교 감리회 4년 총회>의 한국 평신도 대표로 선출되어 다시 한국을 떠나게 되었다.
  • 1920년 콜로라도주 덴버의 안재창(왼쪽에서 두번째) 소유 농장을 방문한 이승만 등 재미 독립운동가들이 기념 촬영을 했다.<br />이승만의 익살스러운 모습을 볼 수 있다.
  • 밴 플리트, 리지웨이 장군과 함께<br />
  • 일제의 탄압을 피해 이승만이 서울을 떠나기에 앞서 서울YMCA 간부들과 함께 찍은 송별모임 사진(1912년)<br />이승만은 33년 후인 1945년에야 다시 귀국하게 된다.
  • 1920년 호놀룰루에서 이승만과 노백린<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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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이젠하워 대통령 당선자의 한국전선 방문 (1952년12월)<br />그는 한국에 가겠다(I shall go to Korea)는 대선공약을 했었다. 맨 좌측은 백선엽 장군
  • 동경에서 열린 이승만 박사 송별회 기념사진 (1912년 4월6일)<br />앞 줄 오른쪽에서 세번째가 이승만. 이승만의 오른쪽이 김정식, 외쪽에 민규식. 뒷 줄 오른쪽 끝에 신석우, 오른쪽 끝에서 아홉번째에 문평일, 열번째에 김성수.오른쪽 원내는 안재홍.
  • 1920년 임시정부 대통령 공식사진<br />
  • 아이젠하워 미 대통령 당선자와 함께 (1952년12월)<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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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6.25 전쟁 중 밴 플리트 장군을 방문 (1952년)<br />출처-Gettyimages
  • 이승만이 일본 유학생들을 모아 독립운동 의식화교육을 했던 일본 카마쿠라 세미나<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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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존 포스터 덜레스와 함께 (1953년)<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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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상하이 교민단이 베푼 환영회 (1920년 12월 28일) 왼쪽으로부터 손정도, 이동령, 이시영, 이동휘,이승만, 안창호, 박은식, 신규식<br />1919년 4월13일 상하이에 세워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대통령이었으며 29년이 흐른 뒤 수립된 대한민국 합법 정부의 초대 대통령도 이승만이었다.
  • 덜레스 미국 국무장관과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 (1953년 8월 8일)<br />
  • 임시정부와 임시의정원 신년축하식 (1921년)<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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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한민국 임시정부 3·1절 2주년 기념식 단상. 상해 정안사로 올림픽극장에서 개최된 3·1절 2주년 기념식 .<br />이승만대통령 이하 국무위원들이 참석하였고 단상 위에서 김병조가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있다.
  • 밴 플리트 미8군 사령관과 함께 (1953년)<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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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한민국 임시정부 3·1절 2주년 기념식 객석<br />
  • 닉슨 미국 부통령과 함께 (1953년)<br />
  • 상해에서 이승만과 신익희 (1921년)<br />
  • 프란체스카 여사 (1953년)<br />
  • 이승만 남경 방문시 질레트(P. L. Gillett) 목사와 선교사들 (1921년 3월 9일)<br />
  • 연설하는 이승만 대통령 (1953년)<br />
  • 상해에서 새장을 돌보는 이승만 (1921년 4월)<br />
  • 방한한 닉슨 부통령과 미국 장성들 (1953년)<br />
  • 상해에서 중국인으로 변장한 이승만 (1921년 4월 9일)<br />일본경찰의 눈을 피하기 위해 입었던 중국인 옷이다.
  • 대만 방문 시 장개석 총통 송미령 여사와 기념촬영 (1953년)<br />
  • 이승만 상해 체류시 크로프트(Croft ) 목사의 저택 앞에서<br />
  • 자유중국 방문을 위해 타이페이 교외의 송산 비행장에 도착한 이승만 대통령이 장제스 총통과 함께 의장대를 사열하는 모습 (1953년 11월 27일)<br />
  • 자유중국을 방문, 장개석총통과 그 각료들의 환영을 받는 대통령 (1953년 11월)<br />
  • 경무대를 방문한 재미교포 올림픽 다이빙 금메달리스트 세미 리 (1954년 1월)<br />
  • 이승만 중국 소주 관광시 크로프트 목사 부인과 함께 (1921년 5월 24일)<br />
  • 1921년 워싱턴에서 열린 군축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구미위원부 청사를 나서는 한국대표단의 이승만 단장과 서재필 부단장<br />
  • 구미위원부 요원들 (1921년)<br />앞줄 왼쪽부터 이승만, 여비서, 돌프 변호사
  • 미국 방문시 아이젠하워 대통령과<br />출처-Gettyimages
  • 구미위원부 직원들과 함께 (1921년)<br />
  • 공항을 영접나온 닉슨 부통령과 함께<br />
  • 아이젠하워 대통령 내외와 함께 백악관에서 (1954년 7월25일)<br />
  • 아이젠하워 대통령 내외는 이승만 대통령 내외를 백악관으로 초청했다. (1954년 7월 26일)<br />이틀 후 이승만 대통령 내외는 워싱턴 DC 메이플라워 호텔에서 아이젠하워 대통령 내외를 위한 만찬회를 베풀었다.
  • 태평양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워싱톤에 도착한 정한경과 이승만 (1921년 11월 12일)<br />
  • 미국 의회 연설<br />
  • 워싱턴에 개설된 사무실에서 집무하는 이승만 임시 대통령의 모습 (1922년 1월)<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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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설 중인 이승만 대통령 (1954년)<br />
  • 호놀룰루에서 이승만이 세운 한인기독교회 임원들과 함께 (1922년 3월)<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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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왼쪽부터 김규식, 이승만, 송헌주. 주로 미국에 근거를 두고 외교활동에 진력하던 시절<br />
  • 국빈자격으로 방미. 브로드웨이에서 카 퍼레이드 (1954년 8월 2일)<br />
  • 하와이 대한인동지회 대표 모임 (1924년 11월 23일)<br />이승만의 독립운동을 지원하기 위하여 결성되었다. 1924년 11월 대한인동지회는 이승만을 종신 총재로 선출하였다.
  • 1954년, 국민소득 70불 세계 최빈국 코리아...그런 나라의 국가수반을 성대하게 환영하는 뉴욕의 풍경.<br />나라는 찢어지게 가난하고 약했지만 한 사람의 뛰어난 지도자가 국격을 얼마나 올려 놓을 수 있는지 이 한 장의 사진만으로도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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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1년<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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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네바 군축회의 참석차 런던에서 제네바로 향하는 도중 파리비행장에 내린 이승만 (1933년 1월 4일)<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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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스위스 제네바 국제연맹(The League of Nations) 본부 앞에 선 이승만 (1933년 1월)<br />
  • 소녀시절 프란체스카 도너 양의 모습<br />
  • 트루먼 전 대통령과의 만남<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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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혼여행을 마치고 호놀룰루항에 도착한 이승만 부부 (1935년 1월 24일)<br />
  • 기념식 후 (1954년)<br />
  • 호놀루루에 도착한 이승만 부부를 따뜻하게 맞아준 하와이 교포유지들<br />왼쪽 끝에 서있는 인물이 하와이 동지회의 지도자 이원순이다.
  • 손수 타이핑하는 모습 (1956년)<br />
  • 이승만이 1938년 4월에 4만여 달러의 건축경비를 들여 준공한 호놀룰루 한인기독교회의 모습.<br />이 건물은 경복궁 대궐의 정문인 광화문을 본뜬 것이다. 앞에 있는 사람들은 이승만을 후원해준 대한부인구제회(The Korean Women's Rellef Society) 의 회원들이다(1939년 2월)
  • 누구에게나 개방된 경무대에 꽃구경을 온 중학생들을 맞이하는대통령 내외 (1956년 4월)<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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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승만이 하와이를 떠나 워싱턴으로 향할 때 LA 동지회 지부에서 마련한 송별연 (1939년 8월 9일)<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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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한인동지회 한인교민 고문단, 한인선교 한인기독교협회 (1939년 10월 25일)<br />
  • 1954년<br />출처-Gettyimages
  • 미국 전역을 다니며 독립을 위해 강연을 하던 시절 (1933년 9월 17일)<br />
  • 1950년대 미국의 반대를 무릅쓰고 원조자금으로 지은 문경 시멘트 공장.<br />이승만 대통령이 방문하여 생산라인을 살피는 모습
  • 미국 와이오밍주에 있는 [옐로우 스톤] 공원 입구에서<br />
  • 뷰트 몬태나 농장에서의 모습 (1933년 9월 16일)<br />왼쪽부터 이승만, 전인수 씨 부인, 장기영 전 서울시장
  • 1942년 1월 16일<br />
  • 해군 창설 제10주년 기념식장 (1955년)<br />
  • 주미외교위원부의 위원장으로 선출된 후 뉴욕에서 (1941년)<br />
  • 기동훈련장 사진 (1957년)<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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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터키 여단 방문 (1956년)<br />
  • 주미외교위원부 주최로 워싱턴에서 열린 한인자유대회 참석자들 (1942년 2월 27일)<br />본 대회에서는 임정 승인을 요구하는 청원서를 미국 대통령과 의회에 제출할 것을 결의했다. 맨 끝에 이승만이 서있고 앞에서 두번째 줄에 프란체스카 여사가 보인다.
  • 1956년 12월8일<br />
  • 워싱턴 라파예트(Lafayette)호텔에서 열린 한인자유대회(Korean Liberty Conference)<br />1942년 2월 27일 - 3월 1일
  • 한인자유대회(Korean Liberty Conference)에서 연설하는 존 커피(John M. Coffee)의원<br />
  • 한인자유대회(Korean Liberty Conference)에서 연설하는 이승만<br />
  • 뉴욕의 Hotel Commodore에서 (1942년 3월 6일)<br />
  • 미주 대한민국 임시정부 승인 후원회 모임 기념 (1944년 1월 23일)<br />
  • 평생 스승인 헐버트선교사 양화진 묘지 방문 (1957년 2월 17일)<br />
  • 논산훈련소를 시찰하는 이승만 대통령 (1959년 9월 19일)<br />
  • 제4대 대통령 선거 (1960년 3월 15일)<br />
  • 구미위원부를 후원한 워싱턴 주미외교위원부협찬회 일동 (1944년 5월 28일)<br />이승만의 외교활동을 지원하였다.
  • 이승만 대통령 중앙재활원(국립정양원)시찰 (1955년)<br />출처-대통령기록관
  • 한미협회가 임정승인을 촉구하기 위해 뉴욕의 에스토리아 호텔에 마련한 만찬회 (1944년 8월 29일)<br />높은 자리의 왼쪽 끝에 프란체스카 여사. 그리고 두 사람 건너 이승만 박사다. 아래에 왼쪽에서 두 번째 테이블의 왼쪽 끝에 자리 잡은 동양청년이 한표욱 박사이다.
  • 국제연합 창립총회 참석하기 위해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워싱턴 대표단 일행 (1945년 5월 22일)<br />앞 줄 왼쪽 끝에서 송헌주, 이승만, 이살음 목사뒷 줄 왼쪽 끝에서 윤병구 목사, 정한경, 유경상, 임병직
  • 이승만 대통령 노동회관 시찰 후 (1960년)<br />출처-대통령기록관
  • 한미협회 (the Korean-American Council)<br />태평양 전쟁 시기 대정부 로비 및 선전활동을 위해 이승만을 중심으로 미국인들로 구성된 단체이다.
  • 4.19 직후 서울대학교 병원을 찾아 발포에 부상한 학생들을 위문하는 이승만 대통령 (1960년 4월 23일)<br />다친 학생들을 보고 그는 울음을 터뜨린다.(해당영상은 2015년에야 대중에 공개되었다.)
  • 이승만이 미국정부에 요청하여 발행한 대한민국의 독립을 기원하는 우표 (1944년 11월)<br />이승만은 이 우표가 발행된 사실을 알리기 위해 상해임시정부에 있는 김구에게 편지를 보냈다.
  • 경무대 이화장으로 돌아가고 있는 이승만을 보려고 모인 군중 (1960년 4월 28일)<br />
  • 사퇴서를 국회에 제출한 이승만 대통령이 이화장에 돌아와 시민들에게 손짓하는 모습<br />
  • 이승만이 이화장으로 돌아오자 시민들과 대학생들이 '만수무강'들의 벽보를 문앞에 붙이고 있다.<br />
  • 1960년 이승만 전대통령이 하야 이후 처음으로 정동교회에 나타난 모습<br />
  • 하와이에서 교민들의 환영을 받는 장면 (1960년 5월 29일)<br />
  • 양녕대군 제17대 양아들로 입양된 이인수박사를 맞이하는 모습 (1961년 12월)<br />
  • 퀸스병원에서 마우나리나 요양병원으로 이송되어 생활 중의 모습<br />
  • 90세 생일 (1965년 3월 26일)<br />프란체스카 여사의 도움을 받아 음식 드시는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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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7년 가족장으로 치뤄진 장례식<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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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운구 행렬을 따르는 국민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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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프란체스카 여사와 양자 이인수씨<br />
  • 1960년 4·19 직후 시위대들이 이승만 동상을 끌어내리고 있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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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파고다 공원에 세워져 있던 이승만 대통령 동상을 시민들이 끌고 다녔다<br />
  • 조각난 채 버려진 이승만 동상<br />
  • 페인트 테러를 당한 이승만 동상<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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